[인터뷰]『두 번째 페미니스트』 저자 서한영교
가사노동·돌봄 하는 남성
여성 문인 향한 성폭력 시
접하고 페미니즘 공부 시작
아내 출산 후 양육 위해 직장 그만둬
“육아 휴직 못 쓰게 하는 ‘유리비상구’ 있어”

'두 번째 페미니스트' 저자 서한영교(왼쪽) 씨는 아버지들도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감동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차영진
‘두 번째 페미니스트’ 저자 서한영교(왼쪽) 씨는 아버지들도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감동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차영진

손바닥만 한 노트를 꺼내들더니 몇 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아이가 문장을 말해서 제가 받아썼어요.” 그가 읽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네. 온다 비 온다. 야옹이가 어디 있어요”라고 읽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지금 이 시간을 놓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잖아요.” 스스로를 ‘남성 아내’라 일컫는 서한영교(36)씨의 이야기다.

서한영교씨가 최근 펴낸 『두 번째 페미니스트』(아르테)는 임신과 출산,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저자 본인의 이야기가 담겼다. 애인(그는 아내를 애인이라 불렀다)의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둔 그는 100일간 양육과 가사노동을 도맡았다. 아내는 수유와 산후조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생명을 돌보는 황홀함과 빨래, 걸레질, 요리, 청소 등 끝이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의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마주했다.

“아기가 일어나서 첫 발을 뗐어요. 이게 이렇게 격하게 행복할 수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아이가 뒤집기를 했을 때는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았어요”라며 육아의 기쁨을 쏟아내던 그는 “살림을 해보니 ‘와 이렇게까지 힘든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시세끼 차리려면 밥만 생각해야 되더라고요”라며 가사노동의 현실을 체감했다.

고등학교 시절 시집을 죽도록 읽던 ‘문학 소년’ 서한씨는 2001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성 문인을 향한 온갖 욕설과 성적 비하가 담긴 박남철 시인의 소위 ‘욕시’를 창작과비평사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보고난 직후다. 시를 보고 말리는 사람이 없는 이상한 현실을 감지했다. 집안일은 엄마가 다하고 부인들이 남편의 아침밥을 꼭 챙겨야한다는 세상의 인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내의 출산 이후 200일이 넘자 서한씨는 가사노동을 분담했다. 아내는 수유, 이유식, 장보기 등을 맡았다. 서한씨는 빨래, 옷 개기, 요리, 청소 등을 담당했다. 300일이 넘자 주 양육 시간을 정했다. 서한씨는 주로 낮에 아이를 돌봤다. 육아를 하면서 아빠보다는 다른 엄마들하고 교류하게 됐다.

ⓒ아르테
ⓒ아르테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자의 노릇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심하게 시달리고 있더라고요. 특히 아버지들은 생계부양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다르게 겪어나가는 게 아버지로서의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했어요. 돌봄을 내 최고의 중심으로 두고 내 삶을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아버지들도 아이들을 돌보면서 감동받을 권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성들에게는 사회적으로 올라갈 수 없는 ‘유리천장’이 있다면 남성에게는 ‘유리비상구’가 있다고 생각해요. 직장에서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아버지들이 한 발 뒤로 빠질 수 없게 말이에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서한영교 씨와 아내, 아들 서로. 서한영교씨와 아내가 혼인의례 할 때 입었던 옷이다. 그는 “페미니즘의 언어가 다양한 상상력을 줬다”며 “양장이 아니라 아내에게 원피스를 입자고 말했다”고 했다. ⓒ아르테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서한영교 씨와 아내, 아들 서로. 서한영교씨와 아내가 혼인의례 할 때 입었던 옷이다. 그는 “페미니즘의 언어가 다양한 상상력을 줬다”며 “양장이 아니라 아내에게 원피스를 입자고 말했다”고 했다. ⓒ아르테

서한씨에게 양육과 가족은 삶의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평일 오후 3시 반. 서한씨가 28개월이 된 아들 서로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온다. 그때부터 서한씨와 아내, 서로 '온전한 우리의 시간'을 보낸다. 번역 작업을 하고 강의를 나가는 서한씨는 모든 스케줄을 이른 오후까지만 잡는다.

20년간 페미니스트로서 살아온 서한씨지만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인다고 했다. 그는 “사회적 차별이나 은근한 시선을 현장에서 매 순간 만나는 여성들 앞에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앞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책 제목을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유 수유는 못하지만 아이 트림을 시켜줄 수 있고 옆에서 잠들어 있는 애인을 보면서 이불을 덮어줄 수 있죠. 그게 두 번째 사람으로서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한씨에게 페미니즘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다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일 같다”며 “아버지로서 생계부양자로서의 모델이 아니라 돌봄을 최우선시 했을 때의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답했다.

“끊임없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 발언들이 나오고 있어요. 현실이 지옥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자 아들 서로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바쁜 걸음으로 떠났다. 오늘도 ‘온전한 우리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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