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죄 성립 요건을 ‘폭행·협박’
아닌 상대방의 ‘동의’로 보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 필요

 

무고는 피해자가 의심받고 가해자는 동정 받는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를 피의자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작동해왔다. 가해자가 이 무기를 실제로 사용하든 그렇지 않든 피해자를 겨눌 수 있고, 겨눌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이다. 이로 인해 피해자의 목소리는 억압되고, ‘가상의 꽃뱀’은 현실화 된다.

성폭력 사건에서 무고라는 프레임이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 수사 및 처벌 과정에서 여전히 적용되는 ‘최협의설’(형법상 성폭력이 인정되려면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그 폭행과 협박이 현저히 저항이 곤란한 정도여야 한다)과 이른바 ‘피해자다움’이라는 기준에 입각해 피해자의 진술이 쉽게 배척되기 때문이다.

미투 이후 무고는 더욱 그 위력을 발휘해 ‘무고죄 법률 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만큼 확장됐다. 검색 포털에 ‘성폭행’, ‘성폭력’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무고죄 맞고소’, ‘명예훼손 고소’등의 대항을 선전하는 로펌의 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성폭력 사건 무고죄에 대한 전향적인 대법원 판결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지난 7월 11일 대법원은 직장 동료를 강제추행으로 신고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은 후 무고로 고소당한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를 입었다는 신고 사실에 관해 불기소 처분 내지 무죄가 내려졌다고 하여 그 자체를 무고하였다는 적극적 근거로 삼아 신고내용을 허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개별적, 구체적 사건에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자가 처하였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아니한 채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기준을 내세워 성폭행 등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 및 신고에 이르게 된 경위 등에 관한 변소를 쉽게 배척하여서는 아니 된다”(대법원 2019.7.11.선고 2018도2614 판결)고 판시했다. 즉, 성폭력으로 기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무고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지난해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는 성폭력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 기준으로서 성인지 감수성을 역설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8.4.12.선고 2017두74702 판결, 대법원 2018.10.25.선고 2018도7709 판결)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한편, 지난 19일 발표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피해자를 '무고'로 역고소한 경우는 2017년과 2018년 두 해 동안 824건이고, 그 중 84%는 불기소되었다. 기소된 사건 중에서도 15.5%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 결국 성폭력무고로 고소된 사례 중 유죄로 확인된 사례는 전체의 6.4%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무고로 처벌되는 경우는 극히 적다. 그동안 우리는 무고라는 가상의 공포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법원 역시 성폭력 사건이 불기소 처분 또는 무죄가 되었다고 곧바로 신고 내용이 허위가 되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가 처했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무고죄는 존재하고, 성폭력 사건의 구성요건으로 최협의설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고를 단지 ‘가상의 공포’라고만 할 수 없다. 무고죄는 국가심판기능의 적정한 행사와 개인의 부당한 처벌·징계를 받지 않을 이익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범죄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무고죄의 보호법익을 전제로 성폭력 사건에서 무고가 작동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비동의 간음죄가 신설돼야 한다. 현행과 같이 최협의설에 의하면 명백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피해자의 경우 자신이 입은 피해를 수사기관에 신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동기를 의심받고 무고죄의 피의자가 될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이 아닌 상대방의 ‘동의’로 보는 비동의 간음죄는 동의 없는 강제에서부터 폭력에 의한 강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연속선에 존재하는 성폭력으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상호 동의와 이해에 기초한 민주적 토대’ 위에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폭행과 협박을 요구하던 방식에서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게 되면, 성폭력과 무고 사이는 지금보다 훨씬 멀어질 것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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