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친구 수천 명 있어도
‘계삭’하면 바로 단절되는 세상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요즘 애들은 더불어 살 줄을 몰라.” 흔히 듣는 말이다. 동료 선생님은 대학 기숙사에 사는 학생이 ‘여러모로 번거로우니 서로 아는 척 하지 말고 살자‘고 룸메이트와 합의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5년 전 쯤 자취하는 대학원생들에 대한 조언이 ‘괜히 싸우지 말고 룸메이트들과 밥솥, 휴지 같이 쓰지 말라’ 였으니, 나름 양상이 발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대의 이와 같은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대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청소년 연구원들이 10대가 10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은 ‘비즈니스 친구 아닌 진짜 친구는 어디에서?’였다. 친구에 대한 고민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비즈니스’ 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흥미롭다. 10대들은 학교 친구가 수행평가 정보를 공유하는 비즈니스 관계에 가깝다고 말한다. 수단으로 의존을 경험해 본 적 있지만, 관계의 가치를 경험하긴 어렵다. 주중에 학교에서는 이동식 수업을 하느라 쉬는 시간에 이야기 나눌 새가 없고, 주말에는 각자 학원이나 활동 스케줄이 있어서 시간 맞추기 쉽지 않다. 고3이 되면 아예 친구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회적 관계를 연습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인터넷에서는 현실 너머의 관계를 확장할 수 있다. 10대들은 100개씩 메시지가 쌓인 대화창들과 2000명의 페이스북 친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SNS 계정으로 관계는 파편화되고, 여차 하면 ‘계삭’(계정 삭제)을 해 단절할 수 있다. 온라인은 새롭지만, 단절과 파편의 오프라인 세계를 반영한다.

문화와 교육을 다루는 대학의 수업에서 한 학생은 자신의 교육 경험을 분석한 글에서 재수학원에서의 고요한 긴 줄에 대해 썼다. 학원에서는 점심 급식 줄에서 대화를 나누면 쫒겨 나 영어 단어장을 가져와 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심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단어장이 없으면 입장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한 줄로 적막하게 서 있는 공간, 한국 사회의 상징 같다.

하지만 시끄럽다고 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 나란히 서있다고 해서 관계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끄러움과 나란히 서있음이라는, 동일성과 위계에 대한 사회의 강한 압력은 고립을 택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삶의 주도권을 가졌다고 느낄 때가 혼자 있을 때라고 청소년들은 말한다. 김현수 정신과 전문의는 10대들이 ‘1인용 인간’을 자처하는 이유가 획일적 삶의 강요에서 최소한의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시도라고 분석했다.

한국 사회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있다. 개체성을 존중하지 않는 전근대적인 압박과 탈근대사회의 고립이 동시에 존재한다. 고립은 이 시대의 문제이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뉴욕의 8배, 도쿄의 3배에 달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이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적십자 연구에 따르면, 다섯 명 중 한 명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다고 한다. B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립을 경험한 영국의 20대는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존하는 걸 배워요”라고 말했다. 혼자인 것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독립과 고립은 다르다. 누군가 자신의 힘으로만 살 수 있다면, 그는 교육, 고용, 주거 등의 측면에서 충분히 혜택 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혼자인 인간은 더 쉽게 파괴된다.

숲에서 나무들은 경쟁하며 살아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영양분을 나누며 협력한다. 다른 나무의 존재는 비바람과 병충해의 보호막 역할을 하며, 다양한 수종은 가뭄을 견디게 해준다. 혼자 살아남는 나무는 없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 같다. OECD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협력적 문제해결에서 아주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청소년들의 95%는 스스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대다수가 개인 작업보다 팀워크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결론은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라는 엄중한 경고나 관계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온정적 공동체의 갈구는 이곳이 얼마나 유기적인 공간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문화연구자 마크 피셔는 신자유주의가 유동적이고 파편적으로 사회를 재편하면서 긴 이야기가 사라지고, 지속적 불안이 현대인과 함께 한다고 말한다. 교실 내 경쟁은 공존을 몸으로 배울 수 없게 한다. 노동유연화 시대, 언제든 해고와 이직이 예비되어 있다. 높아지는 월세에 밀려 계속 이동하면서 ‘동네’를 상상하기 어렵다. 헌신은 착취로 쉽게 돌아온다. 일상적 불안을 견딜 에너지도 부족하다. 책임을 요청하는 타인의 얼굴은 부담이다.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인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내일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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