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손미향 한국해비타트 사무총장
PR 전문가에서 NGO 리더로 변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망치 들고 집 짓는 모습에 감동
15년 여 만에 해비타트로 복귀
아이들 데리고 자원봉사 하는 가족들 늘어나

손미향 한국해비타트 사무총장이 17일 서울 중구 한국해비타트 사무실에서 전 세계에 지어진 해비타트 집들의 모형을 보며 사업설명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손미향 한국해비타트 사무총장이 17일 서울 중구 한국해비타트 사무실에서 전 세계에 지어진 해비타트 집들의 모형을 보며 사업설명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전모를 쓰고 집이 없는 사람을 돕기 위해 집 짓는 현장에 다니는 일도, 초반 작업을 세팅해주는 일도, 자금 마련을 위해 기업 등에서 후원을 받는 일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집이 생겼다”며 감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동안 쌓인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 했다.

손미향(51) 한국해비타트 사무총장은 무주택자에게 살 집을 지어주거나 낡고 허름한 집을 고쳐주는 일을 총괄하면서 순간순간 큰 감동을 받는다고 말했다.

“지붕이 없던 집에 살며 큰 고통을 받아왔던 한 인도네시아 가족은 집에 지붕이 생긴 것을 보고 눈물이 흘리더라구요. 집을 지어준 당신들 이름을 전부 벽에다 남겨달라고 말했어요. 물론 한글로 이름을 써놓으면 읽지는 못 하겠지만 고마움을 간직하고 싶은 그 마음 만으로도 감동이 컸어요.”

해비타트는 무주택 서민의 주거 해결을 목적으로 ‘사랑의 집짓기’ 활동을 벌이고 있는 1976년 미국에서 창설된 민간 기독교 운동단체이다. 한국 본부인 한국해비타트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남아 등지에서도 집짓기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 70%, 해외 3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손 사무총장은 2001년부터 3년 간 한국해비타트의 홍보개발실장을 지낸 후 한국앰네스티, 어린이재단,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나눔공동체, 월드리더스재단 사무총장,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국제개발인재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2017년 7월 한국해비타트로 복귀해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저희는 차상위 계층을 위한 집짓기 활동을 합니다. 24평의 주택에 대해 15년 동안 매달 15만원씩 내야 하는데 2700만원 정도를 집 주인이 부담하는 겁니다. 보통 월세도 50만원 정도는 부담해야 하니까 그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죠.”

이들이 부담하는 상환금은 종잣돈이 돼 다시 지역에 땅을 사고, 다른 가정의 집을 짓는 기반이 된다. 선정위원회는 그 지역에서 가족의 명성과 몇 년 거주했는지, 경제상황을 면밀히 검토하며, 아이가 있는 집을 우선 선정한다. 아이들이 마을에서 행복하게 자라났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새 집에 입주할 사람들은 300시간 집 짓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기 집의 구조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자기 집을 짓는 일을 도와주는 모습에 감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집을 지어주는 봉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해비타트 초반 지방에서 땅을 팔라고 말씀드렸을 때 땅 값 떨어진다고 안 판다고들 하셨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있으니까 학교가 폐교가 안 되고, 작은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고 사람 사는 맛이 난다는 거예요. 저희 지원을 받은 한 가정의 아이는 검사가 돼 정말 뿌듯했어요.”

손미향 한국해비타트 사무총장이 17일 서울 중구 한국해비타트 사무실에서 전 세계에 지어진 해비타트 집들의 모형을 보며 사업설명을 하고 있다.
손미향 한국해비타트 사무총장이 17일 서울 중구 한국해비타트 사무실에서 전 세계에 지어진 해비타트 집들의 모형을 보며 사업설명을 하고 있다.

손 사무총장은 대학 졸업 후 1998년부터 광고대행사에서 PR 업무를 담당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높은 연봉을 받고 싶어했던 보통의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하나의 사건으로 NGO(비정부기구) 리더로서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은 ‘비영리’가 화두가 됐지만 당시에는 커리어에 문제가 된다는 생각이 컸다.

“PR협회 회장님이 영어를 잘 하는 30대 여성이면서 한국적 마인드를 가진 크리스찬이 있는 지 물어보더라구요. 생각해보니 딱 저였어요. 일을 하면 얼마를 받을 수 있는 지 물어봤는데 자원봉사로 페이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뒤돌아서려는 데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님이 한국에 오십니다’고 말해서 딱 발걸음을 멈췄어요.”

해비타트가 매년 한 나라를 골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 집을 짓는 ‘지미 카터 워크 프로젝트(JCWP)’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2001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진행하게 된 것이다.

“3개월이라고 했기 때문에 무보수로 봉사를 해도 되겠다 싶었어요. 이력서에도 눈에 띌 만한 한 줄을 쓸 수 있겠더라구요.” 이를 위해 다니던 광고대행사와 프리랜서로 일하던 통역 일을 그만두고 홍보개발실장으로 일했다.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24시간을 쪼개 쓰며 일했다.

이 행사에는 김대중 대통령도 방문을 했으며,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 대통령도 참여했다. 또 대기업 총수들과 CNN 등 외신 뿐 아니라 국내 주요 언론들도 대거 참여했다. “주요 매체들이 지미카터 전 대통령이 정말 망치질을 하는 지 궁금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냥 보여주기가 아니라 로잘린 카터 여사의 손을 잡고 망치를 들고 직접 집을 지으시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고 다들 놀랐어요. ”

그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해비타트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Habitat for Humanity’ 라는 비전이 마음에 남아 3년을 더 일했다. “처음에는 커리어를 위해 들어왔지만 일하면서 하나님이 이 곳에 맞춤 전도를 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했다.

일을 잘 한다는 평판이 생겨나면서 국제백신연구소 펀드 레이징 본부장(헤드)으로 스카웃돼 이직을 했다. “펀드 레이징이 머니 레이징이 아니라 프렌즈 레이징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외국인들과 어울리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제가 좋아서 고궁에서 외국인들을 안내해주면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저한테 잘 맞기도 했어요.”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는 ‘과학자들도 나눔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전 세계를 돌면서 코스타 유학생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모아둔 마일리지를 코스타 강의를 위해 기꺼이 썼다.

15년 여 만에 한국해비타트에서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을 때 그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한국뉴욕주립대학교에 취업해 강연을 맡고 있던 터라 안정적인 일자리를 놔두고 다시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들이 ‘사람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데 엄마는 어떤 게 더 커?’라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더 크지’라고 답했거든요. ‘그럼 가야지’라고 하더라구요. 그 때 결심을 굳히게 됐죠.”

한국해비타트는 매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한한 것을 기념해 8월 첫째 주에 아산과 천안에서 집짓기 행사를 벌인다.

“저희 홍보대사인 유호정, 이재룡 부부도 아들과 함께 참석해 집을 지어요. 20 가정이 넘게 고등학생 등 아이들을 데리고 봉사를 하더라구요. 아이들이 처음에는 끌려오다시피 하는데 땀 흘리며 집을 짓고 입주 가정이 감사해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가더라구요. 갈 때는 엄마와 다정하게 가는 뒷 모습을 보면 너무 흐뭇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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