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 해리 왕자의 부인인 미국의 여배우 메건 마클이 아들을 낳았다. 해리 왕자는 아시다시피 여왕의 손자이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다이애너 왕세자비와 찰스 왕세자 사이 두 아들 중 둘째다. 그렇다, 영국은 왕(현재는 여왕이지만)과 왕족과 귀족 등의 ‘신분’이 있는 나라인 것이다.

이건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고 노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기본 이데올로기인 현대 사회에 신분제가 있다니. 더구나 차별금지란 후천적으로 습득한 특성뿐 아니라 인종이나 성별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성을 이유로 누군가를 다르게 대우해서는 안된다는 것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대놓고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하는 것이 신분제도다.

당연히 영국에도 왕실 폐지론자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영국인들이 여왕 및 왕실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렉시트 찬성 투표 이후 영국이 유럽연합을 언제 어떻게 떠날 것이냐, 떠나면 어떻게 될 것이냐, 도대체 떠나기는 할 것이란 말이냐 등의 끝없는 논의에 안팎으로 시달리느라 피로하고 지친 영국인들에게 이번 여왕 증손자 출생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소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영국 사회에서 왕실의 구실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고단한 현실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동화 속에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현실에서 보면서 거기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다시 해리 왕자 부부 이야기로 돌아가면, 부인인 메건은 외국인이고 왕자보다 연상인데다가 이혼한 경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흑백 혼혈인이다. 영국 왕실 역사상 유색인이 왕족의 배우자가 된 것은 처음이다. 여왕 및 왕실 측에서 속으로야 어떤 마음이었든 간에 이들의 결합을 내놓고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한 것은 꽤나 획기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도 대단치 않은 이유로 자식들의 결혼에 결사적인 반대를 하는 경우도 드문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이들의 결합에 모든 영국인들이 축하만을 보내는 것은 아닐 터이다.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고, 그런 핑계조차 없이 차별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니까. 해리와 메건 커플이 새로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퇴원하는 날 영국 공영방송인 BBC의 라디오 진행자는 "왕족 아기가 퇴원하다"라는 코멘트에 옷을 입은 침팬지의 손을 잡고 걷는 남녀의 사진을 첨부해서 트윗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인 의도를 담은 이 트윗에 비난이 쇄도했다는 점, 그리고 BBC가 해당 진행자를 바로 해고했다는 점이다.

남의 나라 왕실 이야기를 한참 한 이유는 이렇다.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을 고수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왕가마저도 인종차별 및 사회적 편견을 적어도 겉으로는 파격적으로 털어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 새로 태어난 아기는 계승 서열이 7번째라 하니 실제로 왕이 될 가능성이야 높지 않겠지만 흑백 혼혈이 영국의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니 이웃이나 가족의 일원으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라는 신호를 사회에 보내는 것이다. 이를 보며 뭔가 왕실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도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여전히 신분제란 잘 수긍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5월 20일은 ‘세계인의날’이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 기념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재한외국인이란 누구를 말하는지, 설마 적법하게 머무는 사람만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이미 귀화한 사람은 이제 그저 국민으로 인정해주는 건지 그런 걸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방인을 수용하고 함께 잘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며 지정된 날일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기념일조차 존재할 이유가 없는 그런 시절이 오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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