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항일운동단체 근우회
사회주의-자유주의 합작

좌익 주세죽·허정숙·황신덕·정칠성
우익 김활란·최은희·차미리사 등

여성해방·민족해방 운동 함께
단일한 목적의식 아래 집결

 

1927년 5월 결성된 여성항일운동단체 근우회 발족식 모습이다. 최초의 좌우 단일 여성 조직이다. / 박용옥 역사학자
1927년 5월 결성된 여성항일운동단체 근우회 발족식 모습이다. 최초의 좌우 단일 여성 조직이다. / 박용옥 역사학자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근우회 취지문)

1927년 발족한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를 빼놓고 한국의 여성운동사를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목표로 좌익과 우익이 손을 잡고 대중적·전국적으로 기반을 확산시킨 최초의 조직이다. 당시는 물론 해방 이후 분단, 독재로 이어진 역사 속에서 좌우 단일 조직이 남긴 의미는 크다.

근우회의 등장은 189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에서 시작된 여성 계몽운동의 질적 전환을 보여준다. 서구의 여성운동과 달리 식민지 시대와 함께 본격화된 여성운동은 민족해방과 봉건 타파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항일구국독립운동에 남성처럼 여성도 평등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여성해방이야말로 민족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으로 보고 민족협동전선을 형성하여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부터 조선의 근대화와 함께 여성 계몽의 필요성이 논의됐지만 진정한 여성운동과는 간극이 있었다. 개화기 남성 지식인들은 여성 계몽과 여성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을 키우는데 있기보다는 국가에서 일할 인재를 키우는 어머니와 아내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신여성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다.

이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전개된 3·1운동 참여는 여성의 사회의식이 높아지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후 적극적이고 다양한 여성운동이 출현한 사실은 이를 보여준다.

3·1운동으로부터 근우회가 창립되기까지 약 7년간의 한국 여성운동은 다양한 변화를 보였다. 1920년 상해판 독립신문에는 ‘부인해방문제에관하야’라는 제목으로 13회에 걸쳐 기사가 연재됐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독립’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압제와 속박에서 탈출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라는 내용이다.

근대 여성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기독교 여성단체의 활발한 활동이었다. 주요 여성단체 가운데 80~90%가 기독교 관련 단체였다. (『한국근현대여성사』 269쪽) 이들은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재봉강습회 같은 실용적인 교육과 함께 축첩폐지, 이혼, 공창폐지 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에 적극적이었다. 가장 큰 단체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였다.

또 당시 여성운동의 다른 축인 사회주의자들은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경제적 지식을 갖고 독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특히 식민지 시대 조선 여성의 삶 국가·계급·성에 따른 삼중고의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다. 단체도 잇따라 설립됐다.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는 1924년 설립된 ‘조선여성동우회’였다. 이어 1925년 설립된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지금의 3·8세계여성의날인 ‘국제부인데이’ 기념 모임을 갖고 무산여성을 위한 날로 기념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경성여자청년회’, ‘중앙여자청년동맹’ 등도 결성됐다. 1925년 3월9일 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고 분단 이후 북한 정권에서 문화선전상을 지낸 허정숙이 '수가이'라는 필명으로 쓴 ‘국제부인데이에’라는 기사가 실렸다.

자유주의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양분돼있던 여성조직을 통합시킨 조직이 근우회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영향으로, 전 조선 여성의 단일한 운동단체를 지향하면서 분열주의를 극복하고 여성운동의 통일성과 단합을 강조했다. 강정순·김순복·김은도·김일엽·김활란·길정희·유각경·정칠성·조원숙·주세죽·차미리사·최은희·허정숙·황신덕 등이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들이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들 조직의 통합은 단순한 여성지식인의 단결 차원이 아니었다. 이들의 화학적 결합은 여러 계층의 여성운동을 통합하면서 대중조직체로 확대됐다. 여성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1929년 전체회원은 2975명이며, 가정 주부는 1256명, 직업인은 338명이었다.

근우회 잡지 ‘근우’ 1929년 5월 창간호 표지/ 독립기념관
근우회 잡지 ‘근우’ 1929년 5월 창간호 표지/ 독립기념관

근우회의 기본 강령은 “조선 여성의 견고한 단결 및 지위 향상을 도모하고 조선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각성을 촉진한다”이다. 가부장적인 폐습과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여성에게 제기되는 억압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해 전 조선 여성이 합심해 단일한 조직을 만들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여성해방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신간회에는 여성부 설치를 요구하는 등 여성의 정치적 권한을 확보하는데 앞장섰다.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은 “여성운동이 여성운동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단일한 지도체계 아래에서 역량을 집중해 통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했다. 또 “회원 구성이 교사, 기자, 의사, 간호사 등 신여성이라는 이름의 엘리트층 뿐만 아니라 주부, 노동자, 농민여성을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령에 넣고 사회적으로 혜택을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 활동을 전개하며 여성운동의 대중화에 힘썼다는 점도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근우회의 좌파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우익 기독교계 여성들이 탈퇴하기에 이르고, 1930년 이후 조직이 마비상태에 이른다. 또 일본경찰의 집중적인 탄압도 소멸의 요인이 됐다.

1930년대 이후 점차 여성운동은 친일 관계 여성단체 활동으로 변질됐다. 대표적인 우익 여성지도자가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에 협조하는 형태로 친일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과 회유 등 전시 체제로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좌파 사회주의 여성들의 계급운동은 민중 여성 중심의 사회 변혁을 추구했지만 여성운동이 성별 관점을 유보한 채 반제 반봉건을 주장하는 계급운동에 흡수되는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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