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여섯 해를 치열하게 살다
이제 죽어가는 사람의 맨몸을 주시한 이유는,
‘두려움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포개어 맨몸을 안았다.

혈연에 관한 건조한 글쓰기는, 위험하고 혹 폭력적일 수 있다. 늙음과 죽음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렇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사적인 것 속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드러내고자 함이고, 특히 늙음과 죽음에 관한 통념에 딴지를 걸고 싶어서다. 혈연들 사이에서는 이미 논란이 되어 왔고, 논란이 더 확장되기를 바란다.

2018년 11월 5일 새벽, 여든 여섯의 여성이 죽었다. 그 7일 전 공동 캐어홈의 간호사가 전화해, ‘목욕 후 임종방으로 옮기겠다.’고 알려왔다. 그 6일 전부터 의식이 거의 없어졌고, 그 5일 전부터 삼키는 기능이 없어졌고, 그 3일 전부터 씹는 기능이 없어졌다. 씹지 못하면서부터는 유동식 영양액을 수저로 떠 넣었고, 자주 사래가 걸렸다. 삼키지 못하면서부터는 링겔을 통해 영양과 수액을 공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키지 못하는 단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비위관삽입영양(코와 위를 관으로 연결해 영양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하지 않은 것이고, 그녀가 죽음에 도착한 경로 중 하나는 굶어서다. 그녀가 ‘곡기를 끊은’ 게 아니고, 주변인들이 ‘곡기를 끊게’ 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나는 가끔 ‘엄마는 굶어 죽었다’는 문장을 떠올린다. 자식들 모두는 3개월 여 전 연명의료거부 서류를 제출했다. 아흔인 남편의 의견을 차마 물을 수는 없었는데, 그는 아내 죽음의 단계마다에서 자식들과 간호진에게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그녀가 임종방에 옮겨진 다음 날 남편은, ‘어젯밤 많이 울었다’고 자식에게 말했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아흔의 남자가 자식들에게 울었다는 말을 한 것을, 나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 날 그가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점심에 자식 둘과 중국음식점을 갔고, ‘요가기정’이라는 요리를 처음 먹어봤다. 그 날 밤 나도 울어졌다. 그 동안 보아온 숱한 빈곤 노인들의 죽음과 달리 부자 노인들은 어떻게 늙어 죽어가는 지를 관찰하기 위해 실버타운 근처로 이사해 밀착 관찰과 기록을 하는 중이라고 남매들과 지인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곤 했는데, 그날 나도 울어졌다.

임종방으로 옮긴 3일째 주사바늘 꽂을 혈관을 찾기 어려운 팔목을 보며, 남편은 수액 링겔도 그만 하자고 했다. 모두 비상대기를 유지하며 자식 중 일부가 늘 임종방에 있었고, 밤에도 한 명은 그 방에서 잤다. 사망 15시간 전, 순간적 호흡정지 증상으로 간호사가 인공호흡기를 사용했다. 상태가 좋아져 인공호흡기를 빼는 간호사에게 남편은, ‘이제는 쓰지 말자’고 했다. 임종을 지키겠느냐고 자식 중 하나가 물었고, 그러지는 못하겠다고 흐리게 말했다. 손톱과 발톱에 흑색 증상이 보였다 사라지곤 했다. 간호진이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혔다. 나를 배서 낳아 품고 젖 먹여 키운 어미. 여든 여섯 해를 치열하게 살다 이제 죽어가는 사람의 맨몸을 주시한 이유는, ‘두려움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포개어 맨몸을 안았다. 그날 밤, 가능하면 잠을 자두자며, 한 명만 남기고 일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0시 2분에 핸드폰이 울렸다. 미리 챙겨놓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며,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걸어서 10여분 거리를 걷다 말고, 오는 택시를 세워 탔다. 다섯 자식과 배우자들이 차례차례 모두 모였다.

주시하고 있는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홀로 담담하게 죽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손과 얼굴을 더 만지지 않은 것은, 하고 싶은 말을 소리로 내지 않은 것은, 죽음의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숨이 잦아드는 동안 두 차례의 얕은 진저리가 있었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거리가 차차 멀어졌고, 어느 날숨 후 들숨이 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 주시하다가, 새벽 2시 13분, 우리는 그녀가 죽었다고 말했다. 죽음과 별도로, 우리의 기억과 해석과 질문을 통해, 그녀는 세상에 있다.

박현숙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