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대 기업에 여성은 23.7%뿐
남녀 일자리 격차가
‘대출 격차’ ‘주거 격차’로

‘집다운 집에서 밥다운 밥을 먹으며 살고 싶다.’

나의 오랜 꿈이 곧 이뤄질 것 같다. 월세 원룸 자취 6년 차, 드디어 투룸 전세로 이사한다. 적금 만기? 아니다. 로또?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시민답게 대출을 받았다. 30%는 신용대출, 나머지 70%는 버팀목전세자금대출이다. 1억이 넘는 빚이 생겼으나 이자 합계는 매달 내던 월세보다 20만 원가량 적다. 더 넓은 집에서, 더 적은 돈을 내고 살게 된 것이다.

은행 창구에서 좌절한 경험이 있는 여성 친구들에게 어떻게 그 큰돈을 대출 받을 수 있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 그냥… 은행 가니까 해주던데…” 나도 모르겠다. 철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담보로 삼을 예금이나 부동산도 없으며, 1년의 재무계획이 여름휴가 지르기와 여름휴가 할부 갚기 밖에 없는 신용할 수 없는 사회인의 표본인 나에게 왜? 그래서 이유를 찾아봤다. 내가 대부분 비정규직, 여초 저임금업종에 종사하는 친구들보다 30%가량 더 많은 월급을 받으며 은행 내부등급을 높게 쳐주는 남초 ‘우량 회사’에서 ‘아직’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처럼 ‘비우량’한 사회인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근속하며 매달 성실히 주택청약금과 연금보험료를 납입하는 그녀들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받아, 더 넓은 집에서, 더 적은 돈을 내고 살 수 있게 된 것일까?

(사진은 해당 기사와 관련없음) / 뉴시스

불평등 덕분이다. 대출의 진짜 계약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 30% 더 많은 소득과 ‘우량 회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성차별 문제와 바로 연결된다. 한국 여성의 평균 월급은 남성의 64.7%(2017년, 고용노동부) 수준이고, 600대 기업의 여성 직원 비율은 23.7%(2017년, 한국경제연구원)이다. 채용 성차별, 승진 성차별 등으로 상대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여성들은 은행과 불공정한 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 돈이 돈을 번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구조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기회, 과정, 결과의 불평등이다.

사람은 어쨌든 다 집에서 산다. 한데 이 사회에서는 그 당연한 것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갚아도 못 갚는 돈’을 빚진다. 집이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주택 평균 매매가는 6억4천여만 원, 전국은 3억4천여만 원(2019년 1월, 국민은행)인데, 임금근로자 60%의 월급은 250만 원 미만(2017년, 통계청)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1인가구이든 4인 가구이든 어차피 그 돈은 일해서는 평생 다 갚기 어렵다. 대출 당시의 임금 수준과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직장을 절대 기준으로 누구에게 좀 더 많은 몫을 몰 것인지 선별하는 경제 시스템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임금과 일자리 격차가 ‘대출 격차’로 ‘주거 격차’로 전체적인 부의 격차로 팽창되는, 실금인 줄 알았던 차이가 몸통만하게 커져 공정사회 원칙의 댐을 무너뜨리고 특정집단을 2등 시민으로 고꾸라뜨리는 이 구조에서, 이미 유리천장에 부딪혀 깨지고 멍든 나는 어떻게 생존해야만 할까.

“차별은 딛고 이겨내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굳이 디뎌 싸워야 했던 그 무언가를 전부 일컫는다.”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이민경 지음

여성의 삶에는 너무나 많은 굳이 디뎌 싸워야 하는 차별이 놓여 있다. 차별이라고 명명되지 않은 차별, 차별이 아니라고 부정당하는 차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차별당하는 차별. 그 모든 것을 뽑아내고 평평한 땅을, 평등한 보폭으로 걷는 날을 꿈꾼다. 집다운 집에서 밥다운 밥을 먹으며 함께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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