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여성 독립운동 Ⅰ- ①‘유관순들’은 왜 3.1운동에 나섰을까]
근대교육의 첫 열매
전국 곳곳의 여학교 온상
서대문형무소 수감 여성
75%가 10~20대
3·1운동은 ‘여학생’이
역사 주체로 나선 계기
임시정부 기관지 역할
상해판 『독립신문』
심원의 ‘여학생 일기’ 연재
저항 과정 생생히 담겨

여성독립운동가 292명의 초상화를 들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추모대행진'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독립운동가 292명의 초상화를 들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추모행진을 하는 학생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대한 독립을 위한 첫 피는 대한 여자에게서 흘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상해판)이 1920년 2월 17일자 ‘부인과 독립운동’ 제목의 기사에서 여성, 특히 ‘여학생’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며 이같이 기술했다.

3·1운동은 여성이 정치 주체로 등장한 첫 장면으로 꼽힌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1919년 3·1운동 직전까지 독립운동에 동참한 여성들은 남성 독립운동의 협조자 또는 아내로서 내조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 3·1운동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였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에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여학생들을 상징한다. 당시 숱한 ‘유관순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앞장서 만세를 불렀다. 그 중심에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 등 여학교를 다니는 ‘여학생’이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펴낸 『여성독립운동사 자료 총서』에서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중 확인되는 여성 수감자 180명의 연령을 살펴보면 10~20대가 75.5%에 달한다. 이 가운데 수형카드에 직업이 기재된 96명 중 48.9%(47명)는 학생이었다.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처음 시작했고, 이어 미리흠여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가세했다. 부산 최초의 만세 시위는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손에서 이뤄졌다. 김응수·송명진·김순이 등 11명의 학생이 태극기 100개를 제작해 3월 11일 밤 9시 기숙사를 나와 좌천동 거리로 행진하자, 수백 명이 합세해 2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1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과에서 열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수형카드가 전시돼 있다.
1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과에서 열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수형카드가 전시돼 있다.

하지만 수많은 ‘유관순들’이 어떤 삶의 맥락 속에서 기숙사를 박차고 나와 만세를 외쳤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상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2010년 발표한 『상해판 <독립신문>의 여성 관련 서사 연구』에서 ‘여학생 일기’라는 <독립신문> 연재물을 통해 일제와 가부장제가 동시에 여성들을 억압하는 시대에 여학생이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된 그 맥락을 분석한다. ‘여학생 일기’는 <독립신문> 1919년 9월 27일자 14호부터 21호까지 실린 글이다. ‘심원’이라는 필명의 여학생이 개성 제1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고보(현 경기여중·경기여고)에 진학해 3·1운동에 참가하기 까지 경험을 담은 일기의 일부분을 발췌해 실었다. 이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필자 심원이 당시 상해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김원경임을 처음 밝혔다.

1908년 설립된 경성여고보는 당시 유일한 관립여학교로 총독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조선인 교사가 많은 사립여학교와 달리 교사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일기에는 1910년대 여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여학생들 사이의 민족적 갈등이 생생히 담겼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여학생들의 성장과정도 드러난다. 이 교수는 “‘여학생 일기’는 1910년대 근대교육을 받고 1919년 3·1운동에 적극 나섰던 여학생이 학교에서 받은 노예교육과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는 새로운 사고의 과정이 담겨 있는 글”이라고 평가했다.

‘여학생 일기’에는 3·1운동 1년 전인 1918년 9월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할 때 학생들이 용산역에 환송객으로 동원됐던 일화도 10월 7일자 일기에 소개된다. 당시 교사가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자, 학생들은 침묵을 지킨다. 그러다가 일본인 선생이 “왜 소리가 안 나느냐. 다 벙어리냐”고 다그치는 바람에 여학생들은 마지못해 “망세(亡歲)”라 외치며 반항했다고 한다.

특히 일기는 1918년 12월 21일 고종이 죽은 뒤부터 1919년 3월 1일까지 긴박한 상황을 자세히 보여준다. 교장의 반대에도 여고보 학생들이 단체로 망곡(望哭)을 하는 것부터 시위 준비와 참가 과정, 경찰서에 잡혀가는 등의 기록이 담겼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기록을 남길 만한 처지에 있었던 여성의 절대적 숫자가 적었고, 국내에서는 기록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기에 기록이 남기가 쉽지 않았다”며 “김마리아나 유관순 같은 인물의 내면이나 사상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학생 일기’가 검열이 없는 상해판 <독립신문>에 실린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독립신문 1919. 10. 16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독립신문 1919. 10. 16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합병은 시혜’라는 말에 분노한 학생들 피.피.피

‘여학생 일기’에서는 일본인 교사와 여학생들이 역사를 둘러싼 논쟁이 상세히 담겼다. 아래는 ‘내지(內地)란 일본’이라는 제목의 일기 중 일부로 개성보통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가 ‘일본’이라 부르지 말고 ‘내지’라고 부르라고 하자, 여학생들이 발끈하며 교사에게 항의하는 내용이다.

일인 선생은,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냐. 그러니까 내지와 조선과 합병한 날이라고 한다. 일본과 우리나라와 합병했다고 하면 무식하다고 남이 웃는다.”
“왜 일본이 내지로 변하였나요?”
“변한게 아니라 천황 폐하 계신 곳을 존칭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 각국은 다 일본을 내지라고 하나요?”
“아이, 아직도 세상일을 모르니까 그렇구나. 조선은 일본 안에 있는 조선이니까 그렇지. 비겨 말하면 서울 같은 데서는 행랑 것들이 큰 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단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일본 사람의 행랑것(행랑에서 살던 하인을 낮잡아 이르던 말)들이에요?”
-<독립신문> 제14호, 1919, 9, 27

일본인 교사와 여학생들이 역사를 둘러싼 논쟁도 상세히 담겼다. ‘합병문제의 대 논전’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일기에선 교사의 ‘합병은 시혜’라는 말에 분노한 학생들이 ‘피피피’ 소리를 내며 교실에서 작은 소요를 일으킨 모습이 상세히 묘사된다.

“선생님. 합병하던 이야기를 좀 들려주셔요, 저희는 모르니.”
“당시 조선이 대단히 연약해서 법란서(프랑스)의 속국이 될 뻔했는데, 그러는 것보다는 가까운 우리나라와 합해서 문명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 양편에 더 좋으리라 하여 피차에 잘 상의한 결과로, 조선 임금이 우리 천황폐하께 청원을 드려서 허락이 된 것이다. (중략) 고맙습니다하고 절을 해야 옳지.”
할 때에 일동의 열혈은 분격의 화염으로 극도로 비등돼 일제히 입에서 피피피 소리가 연발되어 교실은 용산전기회사의 발전소로 변하였다.
왜 이렇게 소요하냐. 그 피피피 하는게 무슨 뜻이냐?”
“열날 때에 하는 소리예요” 하는 애도 있고, “설명을 충분히 아니해 주실 때에 쓰는 말이에요” 하는 애, “고마운 사례를 미처 못하였을 때에 하는 소리에요” 하는 애. 저마다 나오는 대로 똑똑 쏟아버렸다.
-<독립신문> 제16호, 1919, 10. 2

 

일본인 교사 “만세하라” 강요에, 여학생들 “망세!”   

일기는 1919년 3월 1일 기숙사 문을 부수고 단체로 뛰쳐나와 시위에 참가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학생들은 이날 ‘불의코 백년 살지 말고 의코 하루 살아라’라는 문구를 화장실 벽에 기록하고 한 사람씩 가보게 했다. 오후 1시경 독립선언서 한 장이 학교에 들어와 돌려보고 있을 무렵,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소리가 들려오자, 학생들은 책보를 던지고 기숙사 후문 열쇠를 주먹으로 쳐 비틀어 대한문 앞으로 달려 나간다. 이 교수는 “ "‘여학생 일기’는 1910년대 학교 현장에서 일본과 조선을 문명과 야만으로 설명하고, 강제병합을 시혜로 설명하는 일본인 교사의 불합리성을 논파하며 맞서는 학생들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과 그것이 3·1운동으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당대, 당사자의 말로 들을 수 있었다는 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은 흔히 ‘상해판’으로 불린다.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동명의 신문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독립신문>은 1919년 8월부터 1926년 11월까지 7년에 걸쳐 모두 198호가 발간됐다. 창간 당시 이광수가 주필, 주요한이 출판부장이었다.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만큼 일제의 검열에서 자유로워 민족주의적 시 등 다양한 글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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