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행동이나 의도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쉽사리 판단하지 말았으면“

딸이 만으로 네 살 정도 되었을 때 일이다. 아이를 데리고 대형 슈퍼마켓에 갔는데 아이가 어린이용 잡지를 사달라고 했다. 당시 아이는 너무나 심하게 수줍어하고 낯을 매우 가렸다. 한국에서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의 낯가림이 영국으로 와서 생김새도 말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인 건 아닌가 하고 고민을 하던 참이었다. 딸에게 뭔가 독립적인 행동을 하게 하도록 유도하고 싶었던 나는 아이에게 혼자 줄을 서고 직접 돈을 낼 수 있다면 잡지를 사주겠다고 했다. 아이는 용기를 내 줄을 섰고 나는 줄에서 약간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아이를 무시하고 계속 앞질러 나가는 것이었다. 아이는 자기를 무시하는 어른들에게 물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내가 아이 옆으로 다가가는 순간, 줄의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이건 줄이라고, 너는 줄을 서야 한다고. 내가 그렇다 줄 맞는데, 여기 아이가 줄을 서고 있는 것이고, 이 아이는 계속 줄에 서 있었다고 대꾸하자, 화를 내던 남자는 멈칫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영국인들이 아이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국인들은 아마도 아이가 혼자서 줄을 서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 때문이다. 저 정도로 어린아이라면 보호자와 같이 서있어야 하지 아이 혼자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게 하는 일은 없다.

아이 혼자 줄을 서서 물건을 사게 해 아이의 낯가림을 좀 고쳐보고 싶었다는 설명을 한국인들이라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육 방식에 동의하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이라면 이런 설명 자체에 매우 의아해할 것이다. 아이가 낯을 가리고 수줍어한들 그건 그 아이의 특성이고,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영국인들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수줍어하는 아이를 보면 그냥 내버려둔다. 아이에게 억지로 말을 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반면 한국인들은 거의 예외 없다 싶을 정도로 아이를 ‘바꾸려고’ 한다. 아이의 낯가림은 고쳐야 하는 일이고 아이가 싫어해도 자꾸 말을 걸거나 억지로라도 인사를 시켜야 한다고 아이 본인과 보호자에게(그 대상이 주로 엄마인 것이 현실이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말한다. 이런 충고 내지 조언을 나 역시 가족을 포함한 한국인들로부터 매우 많이 들었다. 그래서 혼자 줄을 서게 해보겠다는 시도를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새치기하는 동양인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새치기가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기는 했는데 현장에 있던 영국인들로서는 왜 저 동양인 여자가 아이를 혼자 세워뒀을까 의아한 동시에 도통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행하는 단순해 보이는 행동들, 말하자면 아이 혼자 계산대 앞을 줄을 세우는 것 같은 일 뒤에도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른 생각과 판단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익숙한 사고 방식을 공유하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런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크고 작은 차이를 늘상 느끼게 된다.

그동안 살아온 사회와 여러 가지로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란 한편 억울하고 한편 늘 조심스럽고 신경이 곤두선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살고 있는 사회의 언어로 자기 입장이나 행동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다. 한국어를 잘 못하면서 한국인들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그런 누군가가 주위에 있다면 그들의 행동이나 의도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쉽사리 판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보기에 어떻든 그 사람은 사실은 새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그 이후로는 나도 저런 식의 낯가림 극복 훈련을 시도하지 않았다.

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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