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난 세 여자, 에코 페미니스트를 만나다]
인도 불가촉천민 활동가 베다나야기

“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지 간다.) 여자들에게 여행은 독립을 선언하는 행위이며, 경계를 넘는 반란이다. 다큐 감독 유혜민, 환경운동가 고금숙 그리고 여성학연구자 최형미는 (재)숲과 나눔 지원을 받아 인도, 케냐 그리고 태국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긴 여행에서 길러진 통찰과 의지의 근육은 우리를 더 먼 곳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만났던 여성운동가, 환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순간순간의 힘이 되었다.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세 여자가 여행에서 만난 에코 페미니즘과 지역 여성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격주로 전한다.

2012년 인도의 한 여자 의대생이 집단 강간사건으로 살해되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날마다 나서서 시위를 했으며 전 세계는 인도의 대응에 주목했다. 필자는 초국가 여성운동인 EGEP에서 만났던 베다 나야기(Vedha Nayagi) 씨에게 여성폭력 이슈에 강력하게 대처한 인도 여성들을 응원하며, 이후 변화를 알려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예상치 못한 답장을 보내왔다.

“지금 인도의 슬픈 아우성은 오직 델리에 안전하게 사는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다. 시위가 진행된 지난 15일 동안 보파이(Bhopai)에서 임신한 달리트 여성들이 집단 강간을 당했고, 펀자브(Punjab)에서는 달리트 여성이 자살 했으며, 폰디체리(Pondicherry)에서는 15살 달리트 소녀가 집단 강간을 당했고, 벨로어(Vellore)에서는 11살과 13살 어린이가 강간을 당했다. 10월 한 달 동안 하리아나(Haryana)에서 19명의 달리트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그러나 인도는 모두가 잠들은 듯 침묵했고 미디어는 그것에 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사회가 가장 취약한 여성들의 자유와 존귀함을 보장한다면 델리는 자연스럽게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인도를 지배하는 카스트 관습이 여성운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달리트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베다는 그 이후 연락이 없었다.

여행길에 오르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베다였다. 우리는 인도 뭄바이와 벵가룰루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처음으로 휴식을 위해 휴양지 함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베다에게 메일이 왔다. ‘인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만나고 싶다.’ 동행한 친구들은 자신들의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듯, 나의 간절함에 빠르게 공감했고 손해를 감수하며 고속버스, 호텔 예약을 취소했다. 그렇게 갑자기 우리는 베다가 사는 타밀나두 벨로어로 향했다. 야간버스는 새벽 3시에 멀리 닭소리와 개짓는 소리만 들리는 어두운 인도 시골마을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어둠 속에선 사람이 보여도 두려웠고 안보여도 불안했다. 여자 셋이 함께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믿었다. 한참 후, 멀리서 불빛이 깜빡였다. 베다… 베다였다. 그는 저녁에 연락을 받고 꼬박 밤을 새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만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우리를 근처 수녀원으로 안내했다.

인도 불가촉천민 활동가 베다 ©필름고모리 대표 유혜민 감독
인도 불가촉천민 활동가 베다 ©필름고모리 대표 유혜민 감독

조카들을 기르며 혼자 살아온 여성

베다는 세 명의 언니들과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막내 동생이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먼저 철이 나버렸다. 그녀가 대학교 1학년 때 큰언니가 가정폭력으로 불에 타 일주일을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다. 다른 가족들은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죽어가는 순간까지 언니를 지켜본 사람은 베다였다. 경찰은 피해자의 진술이 있었음에도 이 사건을 자살이라고 종결지었다. 3년 뒤, 선생님이었던 둘째 언니도 거짓말처럼 불에 타 살해당했다. 남편이 자살한 채 발견되고야 진실이 밝혀졌다. 그 후 남겨진 조카들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은 막내인 베다였다. 혼자 조카들을 기르며 언니들과 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다른 여성들을 돕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이렇게 그의 달리트 페미니즘이 시작되었다. 그는 지금 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다. 달리트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이 청혼을 했지만 거절했다. 그들은 결혼제도를 밖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달리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선 최형미, 고금숙씨. ©필름고모리 대표 유혜민 감독
달리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선 최형미, 고금숙씨. ©필름고모리 대표 유혜민 감독

달리트 페미니즘

인도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은 역사 저 너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도를 방문하면 동그란 안경을 쓴 암베드카르(1891~1956)의 동상이 여기저기 눈에 뛴다. ‘카스트제도 위에 경제 발전은 오물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라고 그는 말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받았고 영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변호사 자격까지 얻은 천재였다, 인도 대학으로 돌아왔지만 동료 교수들은 불가촉천민 출신인 그와 차도 함께 마시지 않았다. 그가 헌법의 기초를 만들었고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냈지만 사람들은 그를 민족의 지도자로 부르지 않았다. 그를 그저 불가촉천민의 지도자로 여겼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의 고통에 통감하며, 스스로 짓밟힌 자들이라는 의미의 달리트라 명명했다. 사람들은 불가촉천민과 같은 우물의 물도 같이 마시지 않았고, 신들이 성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오직 토지와 물을 담보로 어린 불가촉천민 여성들을 성전에 불러 성매매를 강요했다. 불가촉천민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는 곳에 살아가고 있다. 상층카스트 여성이 여성인권을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응원했지만, 불가촉천민 여성이 인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라고 외면한다. 베다는 불가촉천민 여성만을 위한 달리트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달리트 공동체 방문 하니…

13년 동안 달리트 공동체 운동을 한 베다는 우리를 마을로 안내했다. 하늘색과 초록색 파스텔톤 단층집 사이로 아이들과 여자들이 나와 우리를 반겨주었다. 혜민 감독은 작은 카메라를 직접 만져보게 하며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금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베다를 보자 마을 여자들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베다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 가족이야기를 하며 함께 울었던 베다가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의 강한 어머니였고, 든든한 리더였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공동 탁아소로 초대했다. 베다는 한국에서 온 친구라며 한사람 한사람에게 우리를 소개시켜주었다. 한 소년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흐뭇해하며 우리에게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먼저 따뜻한 물을 은색 그릇에 담아 손을 씻도록 도왔고 망고튀김, 치킨 그리고 밥을 담아 주었다. 우리는 그들의 정성스러운 식사를 즐겁게 누릴 수 있었다. 베다가 진행한 달리트 여성 자조집단은 좋은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고 주택환경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달리트 마을의 여성들은 아름다웠고 아이들은 사랑스러웠다.

베다는 달리트 공동체의 강한 어머니였고, 든든한 리더였다.  ©최형미
베다는 달리트 공동체의 강한 어머니였고, 든든한 리더였다. ©최형미

마을에 달리트 여성운동센터 세워

인도 힌두문화는 불가촉천민들이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암베드카르는 그들의 손을 잡고 ‘성전 들어가기 운동’을 펼쳤다. 저수지물을 못쓰게 하자 그들과 함께 저수지를 찾아가 물을 마셨다. 달리트운동은 이렇게 경계를 넘는 것이다. 베다는 벨로어마을 한 복판에 달리트여성을 위한 ‘센드랄운동센터(thendral movement center: 부드러운 바람결)'를 세웠다. 그곳은 타밀나두 어디서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달리트 여성들이 올수 없는 상층카스트 들이 사는 곳이다. 암베드카르처럼 베다는 금기의 경계를 넘어 마을 중심에 달리트 여성센터를 세운 것이다. 센터는 폭력에 시달리지만 갈 곳이 없는 여성들을 맞아주었고, 우울증에 빠진 여성들에게 쉼을 주고, 생존기술을 가르쳐 독립을 도왔다. 이렇게 자조집단은 100개로 확산되었고, 2천여 명의 여성들이 교육을 받았다. 운전교육 재봉교육 심지어 연극까지 교육하며 그들을 임파워했다.

그러나 그의 운동은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센터를 찾는 여성들이 불가촉천민이라는 것을 알아챈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서 성매매를 한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를 했다. 센터의 건물주인은 월세를 30퍼센트나 높여 괴롭혔다. 베다는 그들을 ’명예훼손죄‘로 맞고소 한 상태다. 오히려 그는 물러나지 않고 이번기회에 마을 공터 국유지를 지목해 달리트 여성 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달리트 페미니즘에서 에그로 페미니즘으로

베다는 상층 카스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불가촉 천민을 차별하고 불편하게 하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다. 그는 달리트 페미니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에그로페미니즘(Agro Feminism, 토지 페미니즘)을 주장한다. 아무것도 없는 달리트 여성들에게 한 평의 땅이라도 있으면 움집을 짓고라도, 주변에 농사를 지으며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가족과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공터가 있으면 그것을 가난한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공유지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베다는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다. 아버지, 언니, 형부 조카들, 모든 친척들이 멋진 옷을 입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커다란 바나나 잎을 식탁에 깔아놓고 석류, 요거트, 생선튀김, 닭고기를 뷔페식으로 내놓았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자 그 뒤에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 ‘여성이 가족의 우두머리다. 그들이 가족을 보호하고 책임을 지고 있는 않는가? 여성들의 힘이 약하면 사회는 파괴적으로 될 것이다’ 라고 베다는 말한다. 강한 어머니처럼 가족을 지켜온 베다의 집에선 먼 길을 여행하는 자유롭지만 비루한 여자들이 귀빈 대접받는다. 마치 그를 찾아온 많은 불가촉천민 여성들이 고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처럼.

인도·케냐·태국의 에코 페미니스트를 만난 세 여자, 유혜민·최형미·고금숙(왼쪽 부터).
인도·케냐·태국의 에코 페미니스트를 만난 세 여자, 유혜민·최형미·고금숙(왼쪽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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