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발전’ 핑계로 예타면제

도로 아닌 지역 일자리와

복지 있어야 시민이 정주

 프리다 칼로의 몇 작품은 정면에서 보는 것만으로 힘이 든다. ‘부서진 기둥’이 그렇다. 한창 에코페미니즘 책을 들여다볼 때 프리다칼로의 전시회를 갈 기회가 있어 ‘부서진 기둥’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프리다의 몸을 받히고 서 있는 중심 기둥은 조각나 부서져 있다. 하얀 코르셋이 몸을 조이고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프리다의 몸은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듯 하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는 철핀이 박혀있다. 프리다는 입 벌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검은 눈동자는 핏빛 고통과 축축한 슬픔이 뒤엉켜 있는 듯하다. 당시 나에게는 그림 속 프리다가 마치 억압받는 자연처럼 여겨졌다. 부서진 기둥에서 프리다는 정복되어야 할 자연이고, 수많은 철핀은 개발주의가 꽂은 정복의 깃발인 것이다.에코페미니즘은 가부장 권력이 여성을 억압하듯,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쪽에는 주체로 자리잡는 남성, 서구, 이성이 존재하고 다른 한쪽에는 타자화되는 여성, 식민지, 자연이 존재한다.

십 년 전 이명박은 영토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요 강을 뒤엎어놨다. 당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희대의 만병통치약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기후변화로 인해 하천을 정비해야 하는데 강에 보를 만들면 홍수와 가뭄을 막는다고 말했다. 34만명의 일자리 창출도 되고, 경기침체를 돌파할 방법이기도 하단다. 그뿐이랴, 4대강 곳곳에 자전거 도로와 관광시설로 전 세계인이 찾는 관광명소로 만들겠다고도 약속했다. 당시 한 한수원 연구원은 칼럼에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하천의 산적한 문제들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종합예술작품’”이라고도 표현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뒤 "건설현장에서 망치소리가 울려퍼질 때 국민은 희망의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며 문제는 속도라 전광석화같이 공사를 착수하고 질풍노도처럼 몰아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망치소리가 끝난 후 강에 남은 것은 썩은 내 나는 녹조물과 다시 부숴야 할 수십조 원짜리 보뿐이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23개의 지역에서 진행되는 24조원 재원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내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예비타당성조사의 면제 조항을 수정해 대규모 토목사업을 진행한 MB 정권을 비판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후보시절 대규모 토건 사업은 타당성을 철저히 따져 추진 여부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한정된 국가 재정을 ‘4대강’같은 토건사업보다 사람에 우선 투자하겠다는 원칙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예비타당성조사는 김대중 정권에서 대규모 국책사업 진행 시 예산 낭비를 막고, 고비용 저효율 사례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총 사업비 500억원 이상, 정부 재정 지원 규모 300억원 이상의 신규사업을 대상으로 한다. 경제성 뿐 아니라 지역균형발전 분석, 정책성 등도 타당성 판단의 중요한 요소다.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그 사업이 타당한지, 예산을 투자한만큼 효용성이 있을 것인지, 지역 균형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 정책적으로 중한 것인지를 모두 따져보고 검토하는 것이다. 경제성이 낮다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공익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면 정치적 결단에 따라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예비 타당성 조사를 해 놓아야 사업 이후 예측한 만큼 효과를 얻은 사업이었는지 확인, 평가할 수 있다. 그만큼 예비타당성조사는 필수적인 최소한의 절차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마저 ‘균형발전’이라는 핑계로 예타면제를 3개월만에 졸속으로 결정했다.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던 정치인이었는데. 권력을 잡으니 토건삽질에 대한 욕망을 억누룰 수 없는 것일까.

독일 녹색당의 상징적 인물인 페트라 켈리는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생태적인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군국주의와 환경파괴와 성차별주의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보통 권력자들의 가부장적 욕망은 전쟁이나 개발로 나타난다. 더 큰 공익처럼 보이는 명분을 내세우며 말이다. 부시는 인권을 수호하겠다며 전쟁을 벌였고, 이명박은 강을 살린다며 강을 파해쳤는데, 문재인마저 균형발전이라면서 고속도로를 깔고 있다.

권력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명분을 앞세워 숱한 폭력을 휘둘러왔다. 한국은 특히 그렇다. ‘한강의 기적’을 몸소 체험한 나라다. 허허벌판에 도로를 깔고 아파트를 지으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반대편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버텨야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처절한 외침은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명분에 아직도 가로막혀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한다는 논리는 사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제주에는 비자림이라는 숲이 있다. 1년에 1mm씩 자라는 비자나무가 빽빽한 곳이다. 비자림을 걸으면 숲이 지니고 있는 천년의 시간이 느껴진다. 풀냄새, 비자나무 향, 새소리, 서늘한 나무의 그늘. 그런데 제주도가 그 나무 900여 자루를 싹둑 잘라내버렸다. 좁은 차도를 확장해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말이다. 길이 막히면 베어나고, 돌아가게 되면 뚫어버리고. 무지막지한 삽질에 자연은 속수무책이다. 전쟁에서 강간당한 여성과 파헤쳐져 썩어가는 강. 집에서 내쫓긴 세입자와 서식지가 사라진 도롱뇽. 남성적 권력의 망치질에 몫없는 자들, 소수자, 약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동식물을 포함한 많은 생명들은 너무 많이 짖겨졌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월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을 발표하며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이날 선정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 사업은 총 23개 사업·24조1000억원 규모로 결정됐다. / 뉴시스·여성신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월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을 발표하며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이날 선정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 사업은 총 23개 사업·24조1000억원 규모로 결정됐다. / 뉴시스·여성신문

 

예타면제의 명분인 ‘지역 균형 발전’은 4대강 사업을 하면 ‘강이 살아난다’는 주장만큼이나 실체가 불분명한 허구다. 나 또한 지방도시 쇠퇴에 대한 걱정이 많다. 수도권 중심의 시스템을 바꾸어내는 것은 지역 간 불평등을 완화하고, 지역 주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대한민국의 필수적 과업이다. 오랜 시간 켜켜히 쌓인 구조이니만큼 바꾸어내기 위해서는 담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도시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 일은 이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비전도 계획도 없고 사후 평가도, 책임도 물을 수 없는 무책임의 끝판왕이다.

지방도시 쇠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속도로가 아니다. 오히려 고속도로나 고속철도 같은 고속교통망은 지역에 독이 될 수 있다. 중소도시와 대도시 간 연결되면 소위 빨대 현상이 발생한다. 빨대효과란 빨대로 컵에 들어 있는 물을 빨아들이듯이 고속교통 수단의 연결로 대도시가 주변 중소도시의 인구나 경제력을 흡수하는 대도시 집중현상을 말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예는 춘천이다. 2009년 서울에서 춘천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2012년 ITX 청춘선이 개통되면서 서울과 춘천은 가까워졌다. 통학이 1시간 이내로 가능하게 되자 춘천지역의 자취생은 30%나 줄어들었다. 이어 대학가 주변 상권이 쇠퇴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한 소규모 상권만이 그나마 활력을 잃지 않았을 뿐이다. 도로는 한번 깔면 물리기 어려워서 신중해야 한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건설했지만, 예측한만큼 사용되지 않는 도로/철도도 많다. 2018년 기준 한국도로공사가 지난 10년간 건설한 고속도로 13개 구간 가운데 12개 구간의 수요예측이 빗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동해선 주문진~속초 구간으로 예측량은 하루 평균 4만1000대 수준이었으나 실제 교통량은 1만2000대로 29%에 불과했다. 1800억원을 들여서 만든 서남권신산업철도는 연간 30번 정도 열차 운행했다가 6년만에 폐쇄되기도 했다. 울진공항은 1300억원이 투입되었지만 취항할 항공사가 없어 개항도 못하고 결국 비행훈련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사 AFP가 뽑은 2007년 ‘10대 황당 뉴스’에 들어갔다. F1 경기장 등 만들어놨지만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시설도 있다. 인프라가 장식품도 아니고 쓰지 않을 것에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누군가 말한 것처럼 나라에 예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도둑놈이 많을 뿐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시설들은 한번 만들면 영원불멸한 인프라가 아니다. 관리를 위해 또 세금이 들어간다. 불필요한 인프라는 세금먹는 하마가 될 것이고 이를 감당할 이들은 십대, 이십대 청년들이다. 애초에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신중하게, 필요한 곳에 진행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그러라고 20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문제를 피해갈 제도를 만든 것 아니겠는가?

지역 균형 발전에서 짚어봐야할 지점이 또 있다. 지역이 소멸하지 않고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필수적이다. 지역에 일자리를 비롯한 생산/소비/재활용의 구조와 복지 인프라가 있어야 시민들이 행복하게 지역에 정주할 수 있다. 인구를 토대로 안정적인 도시 내 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지자체는 안정적인 세원을 마련할 수 있다. 이 가정의 필수 요소는 바로 인구다.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자체마다 목표로 하는 인구수가 있다. 진천군은 시로 승격하기 위한 도시기본계획을 갖고 있다. 2030년 목표를 현 인구의 2배인 30만명으로 잡았다. 충남 천안시는 오는 2035년까지 67만명에서 96만명을 늘릴 것이라 목표로 하고 있다. 경남 거제시는 2030년까지 27만명을 37만8000명까지 늘리겠다고 계획했다. 마광래 교수는 현재 전국 지자체들이 뻥튀기한 인구를 모두 합치면 1300만 명 정도로 이런 계획대로라면 10년 내외에 실제 인구의 26%가 증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속도로 닦기 이전에 성공적인 지역 발전을 위해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준비해야 할 판인 것이다. 가임기 여성지도, 출산율 목표치가 다 여기서 나온다. 지역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이나, 여성이나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재정 자금은 한정적이다. 개발 예산이 늘어나면 그만큼 다른 예산은 줄어든다. 2018년 국회 예산소위에서 한부모 가정시설 지원 예산 삭감 사건이 문제가 된 적 있다. 자유한국당 송언석 의원이 한부모시설을 지원하는 예산 61억원 전액 삭감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 것이다. 파장이 일파만파 커지나 송의원은 사과하면서 옹졸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경제상황과 4조원 세입 결손을 초래한 정부 예산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아픔을 나랏돈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산 편성에 신중히 처리하자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몇 달 전 송의원은 SNS에 지역 예산 827억 원을 확보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도로 공사에는 아낌없이 예산을 퍼부으며, 복지 사업에는 신중 편성 운운하는 것이다.

한국은 2017년 사회복지에 투자한 예산이 OECD 국가 중 꼴찌다. 470조나 되는 슈퍼 예산인데도 복지예산은 OECD 평균 21%에 절반인 10%밖에 안된다. 이러니 나라 곳간은 풍년인데 국민 삶은 팍팍한 것이다. 한국은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일전에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며 “4대강 사업에 들어간 재정으로 4차 산업혁명 투자를 했으면 지금쯤은 기술 개발이라든가, 인력 양성이 많이 돼서 산업의 경쟁력이 많이 좋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타면제가 지역균형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현재의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목표는 허상에 가깝다는 것을, 저출산과 저성장 시대에서 지역과 수도권의 격차를 줄일 새로운 비전과 상을 다시 그려야 함을 더불어민주당이나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왜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진짜 변화보다는 케케묵은 MB식 토목쇼를 펼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저렇게 고민해봐도 이유는 하나다. 다음 선거용이다. 표를 위해 예비타당성조사라는 필수적인 절차를 뭉게고 선심쓰듯 온 도시의 토건족을 위해 세금을 나눠주는 것이다. 지역 주민의 절실함과 시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 미래를 바꿀 기회를 사용해 펼치는 총선쇼라니.

추운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던 시민으로서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역사를 쓰길 바라고 바라왔다.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 정부보다 덜 악독한가? 모르겠다. 이러다가는 거울에 비춘 모습인양 서로 닮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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