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여자들의 재산권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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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명의 재산, 아내 동의없이 처분 많아

부부재산 공동명의제 시급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한 할머니의 이혼소송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다. 그 할머니는 자신의 주도적 역할로 큰 재산을 모았으나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수십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모 대학에 기부했다며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현행 부부재산제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남편의 이름으로 재산을 등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여성들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아 남녀간 불평등을 조장하는 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여성부가 부부별산제의 단점을 보완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추진중인 부부공동재산제가 도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업주부 재산권 행사 더 어려워

현행 민법의 법정재산제는 부부별산제. 결혼 전 재산과 결혼 중 상속받거나 증여받은 재산은 각자의 고유재산으로 간주하고 소속이 불분명한 가재도구 등은 부부 공동의 재산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명의로 돼 있는 재산. 이혼시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해도 이를 규제할 방법이 없다. 재산분할청구권을 동원해도 전업주부는 30% 정도밖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무원을 남편으로 두고 있는 김정숙씨(가명·47). 남들이 보기엔 자녀들도 자기 앞가림을 할 만큼 성장하고 가계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됐지만 남편과 갈등이 심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전업주부로 20년이 넘도록 집안살림을 해왔지만 남편은 모든 경제권을 쥔 채 자신에게는 겨우 생활비만 지급하고 있는 것.

얼마 전에는 “이젠 자식들도 클 만큼 컸으니 이젠 나도 자신을 가꾸며 살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했다가 뺨을 맞고 집을 나왔지만 수중엔 몇만 원밖에 없어 갈 곳이 없다. 자신 명의로 돼 있는 재산이 없으니 변호사를 살 수도 없고, 이혼한 후 재산분할 청구를 할 수 있지만 한국의 현실은 전업주부의 노동을 ‘하찮게’ 평가하는 현실이 막막하다.

47년째 결혼생활을 해오고 있는 박단심씨(가명·67). 이제 먹고 살 만할 정도가 됐는데도 남편은 최소 생활비만 주고 집안을 꾸려가게 한다.

식비에 공과금 내기도 빠듯한 데다 수중에 돈이 없어 외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만 박씨는 자신의 집안에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모든 재산이 남편 명의로 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재산을 분할받아 마음 편하게 살고 싶지만 일정 부분의 권리라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혼해야 하고, 이혼을 하더라도 위자료 수준도 안되는 재산을 받아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난감하다.

두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여성들의 재산권 행사는 지극히 제한돼 있어 부부별산제는 남녀불평등의 주범 중 하나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집안의 주요재산을 남편명의로 해두는 경우가 많아 여성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전업주부들의 경우 부업을 했다 할지라도 이혼으로 갈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여도’가 반영될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면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상승하고 의식이 성장, 아내가 주요재산의 명의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자신의 재산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부갈등 요인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많아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맞벌이 부부라 할지라도 일단 남편의 명의로 해둔 경우엔 남편이 재산을 처분중이거나 이미 처분했을 때 보호받기가 어렵고 소송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미 부부관계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프랑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부부재산을 명의에 관계없이 공동소유로 간주, 부부가 이이혼하면 엄청난 위자료를 물어야 한다.

부부재산에 대해 여성계는 현행 부부별산제에 대한 대안으로 ‘부부재산공동명의제’를 제안하고 있다.

부부간의 재산을 공동명의로 해 부부의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고 여성의 정당한 재산권 확보와 경제력 향상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여성계는 “재산분할청구권이 있다고 하지만 이혼할 때만 행사할 수 있어 이혼 전 남편이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해도 막을 방법이 없고, 분할 비율 기준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등 문제점이 많았다”며 “현행 부부별산제의 대안은 부부재산공동명의제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편 채무 떠안는 것도 문제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부부재산공동명의제를 실시하면 결혼 후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다”며 “도박 등으로 인한 갑작스런 재산손실의 경우 배우자가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고 재산분할을 할 때도 재산권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전업주부의 재산형성 기여도가 30% 정도밖에 인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가사노동을 통해 여성이 재산형성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게 하는 제도도 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 부부재산관련법 중 취득세와 등록세 등에서 발생하는 남녀차별적인 법 조항 개정을 앞당길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부는 이같은 여론을 반영해 ‘부부공동재산제’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9월 공청회를 가진 데 이어 올해부터 2007년까지 정부가 추진할 제2차 여성정책기본계획안에도 이를 적극 도입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바 있다.

특히 올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고 특히 부부공동재산제 추진을 위해 일정기간 동안 부부 공동명의에 따른 증여세, 취득세, 등록세 등을 특별삭감해 주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경제평등은 부부평등의 시작

여성계는 “여성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부공동재산제는 부부별산제의 단점을 보완해 이혼과정에서뿐만 아니라 결혼생활에서도 부부가 실질적으로 동등한 경제적 지위를 누리도록 하는 방안”이라며 일단 환영의 뜻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채무도 함께 변제해야 하는 등 단점에도 노출돼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상담위원은 “지난해 상담사례 중 경제갈등, 생활무능력, 빚 등 경제관련 상담이 증가”했다며 “20대(57.9%)부터 60대(35%)의 여성들이 남편과의 경제적 불평등을 호소, 권리를 찾고자 하는 상담이 줄을 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남편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산은 나누지 않으려고 하면서 카드 빚 등 채무가 생기면 부부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갚을 것을 요구한다”며 “아직은 경제적 약자인 주부들은 최악의 경우에 가서야 소송을 하는 사례가 많아 더욱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부부공동명의제는 결혼 후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할수 있는 수단”이라며 “IMF와 같은 경제위기 상황이나 도박 등으로 인한 갑작스런 재산손실의 경우 배우자가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지 못하고 재산분할시 여성의 재산권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공동명의 서류는 한 사람이 등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등기에 필요한 기본서류를 준비해서 이름만 공동으로 올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며 “‘사랑하는 사이에 무슨 돈을 따지냐’는 인식을 바꿔 노력해서 모은 돈과 재산을 공동명의로 하는 것을 당연시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한 미국의 10개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공유재산제도’는 혼인 중의 경제 활동을 통해 취득한 재산은 모두 부부의 공동소유다.

또한 자산은 공유재산과 특유재산으로 구분돼 취득시기가 혼인 중이 아닌 재산과 혼인 중에 취득했더라도 증여·상속받은 재산은 각자의 특유재산으로 분류, 그 나머지는 공유재산으로 하고 있어 한국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정현백 대표는 “부부평등을 실현하기 어려운 이유중의 하나가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라며 “가정내에서도 권력의 분배가 경제적 지위와 맞물리는 상황에서 부부재산의 공평한 분배는 평등부부의 첫걸음이다”고 말했다.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가족문제 차원에서 주부들의 취업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며 “여성이 재산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이혼시 불평등한 재산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권리찾기’에 적극 나서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나신아령 기자arshi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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