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
전시 성폭력 피해자에서
‘역사의 증언자’로
마지막 소원은 “일본 사죄”
“끝까지 싸워달라” 당부

14세에 끌려가 8년 뒤 귀향
음식 장사로 생계 이어가다
92년 처음 피해 사실 증언
‘위안부’ 피해 진상 밝히고
책임 규명 위해 27년 헌신
‘김복동 평화상’ 제정 등
여성 인권 향상에 앞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 나를 대신해 재일조선 학교 아이들 지원도 끝까지 해 달라.”

역사의 증언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김 할머니는 1월 28일 밤 10시41분 일본 정부의 사죄를 끝내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김복동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드러낸 여성 인권 운동의 기념비적 존재다. 1992년 1월 17일, 예순 두 살의 김복동 할머니는 ‘정신대 신고전화’에 직접 전화를 걸어 처음 ‘위안부’ 피해의 진상을 증언했다. 이대로 있다간 ‘위안부’ 문제가 그대로 묻혀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김복동 할머니는 “나와서 말하지 않으면 지워지고 잊혀지는 일이라는 생각에 증인으로 나서게 됐다. 그리고 나섰으니까 끝까지 가자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로부터 27년 간 그는 ‘위안부’ 진상과 책임 규명을 위해 헌신했다.

8일 오후 12시 서울 종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22돌 기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정기 수요집회'(1108차)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위안부 수요정기집회 22돌을 축하하기 위해 미 세인트캐서린대학에서 온 도나 디글래시아 교수와 제자 18명이 함께했다.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여성신문 신유리 기자
2014년 22주년을 맞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정기 수요집회'(1108차) 모습. ⓒ여성신문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경남 양산에서 딸만 여섯인 딸 부잣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복 받을 복(福), 아이 동(童),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홀로 여섯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는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위로 세 언니를 서둘러 시집보냈다. 14세가 된 넷째 딸은 “군복 공장에 취직시키겠다”는 누런 옷의 일본 사람들의 반 협박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제 막바지인 1941년이었다. 어머니는 떠나는 딸의 치마 안주머니에 1원짜리 돈을 꾸깃꾸깃 뭉쳐 넣어줬다. “일본 가서 배고프면 뭐라고 사 먹어라. 이 돈 떨어지면 집에 연락해라”라고 했지만 넷째 딸은 8년이 지난 뒤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터로 끌려다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양산에 돌아왔으나 공장 다니다 온 줄 아는 가족을 보는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결국 “시집 가는게 소원”이라는 어머니에게 고백한 뒤 그는 함바집부터 국밥집과 횟집까지 홀로 음식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40여년이 흐른 1991년, TV에서 ‘정신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광고를 처음 접했다. 망설이던 그는 “나를 찾기 위해” 피해를 증언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여성인권운동가의 삶이 시작됐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3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통상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해 10월 3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통상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로선 처음으로 파견돼 증언한 것을 비롯해 김복동 할머니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곳곳을 정신없이 다니며 해 생존자의 목소리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기 위해 길원옥 할머니와 ‘나비기금’을 발족하고, ‘김복동 평화운동상’을 제정해 여성 인권을 위해 헌신하는 후배 여성들을 물심양면 도왔다. 평소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라는 호칭을 거부했다. 노예로 끌려 다니며 희생됐기에 ‘성노예’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뜻이었다.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지만, 그래서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2012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 중

15일 오전 경기 성남시청 광장에 세워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평화의 소녀상’의 얼굴을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쓰다듬고 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cialis coupon free prescriptions coupons cialis trial coupondosage for cialis site cialis prescription dosage ⓒ뉴시스·여성신문
경기 성남시청 광장에 세워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평화의 소녀상’의 얼굴을 쓰다듬는 김복동 할머니가 쓰다듬고 ⓒ뉴시스·여성신문

김복동 할머니의 걸음 걸음이 국제사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는 여성신문과의 2015년 인터뷰에서 나비 기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비가 땅 밑에서 일 년 동안 고생고생 해서 벌레가 됐다가 하늘로 날아오르잖아. 우리가 고생했지만 지금은 나비처럼 날아올랐어요. ‘반대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 ‘나비가 돼 주겠습니까’ 하면 다 ‘예!’ 하지.”

27년간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바람은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故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의 영정사진
1월 29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故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의 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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