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신간 『유머니즘』 펴낸 사회학자 김찬호
유연하고 예리한 지성
상대를 배려하는 감성
어우러져야 ‘유머니즘’
웃자고 던진 한마디가
타인에게 모멸감 주기도
“유머의 가장 큰 적은
권위주의… 깨부숴야”

신간 『유머니즘』을 낸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를 17일 서울 마포구 ‘문화과지성’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찬호 교수는 『유머니즘』에서 유머라는 키워드로 한국 사회의 감정 지형도를 살펴봤다. 김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에는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쾌감을 느끼는 비웃음,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는 희롱, 권력과 지위에 도취돼 짓는 과시적인 미소 등의 병적인 웃음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배꼽 빠지게 웃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돌아보면 학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만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거나 마음 맞는 가족, 지인들과의 편한 자리에서 ‘빵빵’ 터질 때가 많았다. 반대로, 웃자고 한 이야기에 상처를 받는 일도 종종 생겼다. 남들은 다 웃는데 웃음거리가 된 나만 웃지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를 때가 있었다. 속 좁은 사람 취급 받을까봐 그 자리에서 말 못하고 집에 돌아와 분을 삭히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웃음을 줄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되는 상황을 목격한 적도 많았다. 농담을 던진 이는 그런 상황과 당사자가 겪을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거나 인식조차 못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인문학자 김찬호(56)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함께 웃지 못하는 웃음은 폭력”이라며 ‘유머니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유머니즘은 유머와 휴머니즘을 결합한 말이다. “유머를 위한 유머가 아니라, 인간애로 연결되는 유머라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돈의 인문학』, 『도시는 미디어다』 『눌변』 등 다양한 저작을 펴낸 김 교수는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강의하면서도 그의 말마따나 “일회용 강의”를 많이 하는 ‘거리의 인문학자’다. 대학에서 정규직 교수를 맡기를 원했던 적도 있지만, 그 기대를 접고 지금은 거리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만나며 활발하게 저작과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2014년 펴낸 『모멸감』을 통해 무시하거나 멸시하면서 모멸이라는 감정을 주고받는 한국 사회의 기저를 분석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주목 받았다. 전작이 화제를 모은 만큼 신작을 준비하는데도 부담이 컸다. 특히 제목을 정하고 책을 썼던 『모멸감』과는 달리 『유머니즘』은 제목을 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유머니즘’은 딸이 권한 제목이다. 대중매체와 문학 평론에서 쓰이기 시작한 개념이지만, 처음에는 말 장난 같아 제쳐뒀는데 결국 제목으로 정해졌다.

『유머니즘』  저자 김찬호, 문학과지성사
『유머니즘』 김찬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김 교수가 책을 쓰기로 마음 먹은 계기는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함께 웃지 못한 경험’을 하면서다.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농담을 던졌다가 분위기가 썰렁해졌어요. 무슨 농담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함께 웃을 수 없다는 경험은 당황스러웠어요. 근본적인 정서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생들과 저는 공유하는 경험이 너무 없었던 거죠. 가족이 둘러 앉아 엄마 아빠의 어릴 적 사진을 보다 보면 그때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지금과 다른 모습에 웃을 때가 있요. 그런데 가족 아닌 타인이 보면 하나도 웃기지 않잖아요. 엄마와 자녀가 관계가 나쁠 때도 안웃죠. 기억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쉽게 웃음이 터지는 거죠.”

‘어떤 말이나 표정, 동작 등으로 남을 웃게 하는 일이나 능력. 또는 웃음이 나게 만드는 어떤 요소’. 유머의 사전적 정의다. 예기치 않은 의외성으로 무거운 공기를 한순간 부드럽게 바꾸고, 사람과 사이 사이의 거리를 멀게도, 가깝게도 만든다. 웃음에는 수 많은 ‘결’이 있기 때문이다. 농담이 희롱이 되고,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덤벼들면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상사의 아재 농담에 비위를 맞추려 억지웃음을 지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유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한다. 김 교수는 “맥락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화의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농담은 다른 효과를 가져요. ‘섹시하시네요’라는 말을 어디서, 누구에게 하느냐, 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요. 미묘한 코드가 중측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농담이 힘든 거죠. 그래서 유머는 신뢰와 공감이 있는 곳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김 교수는 좋은 웃음과 나쁜 웃음을 가르는 기준은 결국 ‘공감’이라고 했다. 유머의 젠더 차이도 여기서 비롯된다. 심리학자 로버트 프로바인이 누가 많이 웃는지 관찰·기록해 통계를 낸 결과를 보면, 여성은 남성의 농담을 들을 때 70%가 웃는 데 비해, 남성은 여성의 농담을 들을 때 38%만 웃는다. 김 교수는 책에서 “남성 지배 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돼온 사회의 남녀 관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빚어내기도 한다”면서도 “권력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도 여성이 남성의 농담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고 했다.

“농담을 던지는 사람, 남성들은 상대방의 웃음을 자아냄으로써 자기 효능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데, 여성이 그러한 인정 욕구에 너그럽게 부응해주는 편이예요.

17일 서울 마포구 ‘문화과지성’ 사무실에서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신간 『유머니즘』에 대해 말하고 있다.
17일 서울 마포구 ‘문화과지성’ 사무실에서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신간 『유머니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감과 함께 포착·표현·연기·동심·넉살은 김 교수가 정리한 유머 감각을 구성하는 기둥이다. 이 여섯 가지 가치를 잘 살펴보면 반드시 유머 감각을 키우는데만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분명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김 교수는 “행복을 가늠하는 한 가지 지표로서,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보자”고 권했다.

“함께 웃는다는 건 적어도 그 순간 하나가 된다는 걸 의미해요. 기꺼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말도 잘 통하죠. 웃음 코드가 같다는 건 서로 많은 것을 공유했다는 것이고 서로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내가 언제 잘 웃는지, 누구와 함께 웃었는지 웃음의 역사를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온몸으로 웃을 때와 울 때가 본연의 자신이거든요. ”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쾌감을 느끼는 비웃음,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는 희롱, 권력과 지위에 도취돼 짓는 과시적인 미소까지 병적인 웃음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유머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강렬한 연결고리라는 점도 유머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이유다.

“웃음은 가장 가벼우면서도 강렬한 연결고리예요. 인간은 연결되고 싶어해요.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접점이기 때문이에요. 유머도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예요. 다른 조건이 아무리 잘 갖춰져 있다 해도, 타인과 연결되고 공감하는 회로가 막혀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이 아닐까요. 그래서 유머가 필요하죠.”

김 교수는 유머의 가장 큰 적으로 권위주의와 허세를 꼽았다. 유머니즘을 알려 이를 깨부수고 싶다고 했다. 경솔함이나 경박함을 벗고 심각한 허세를 내려놓고 솔직해질 때 비로소 진솔함과 경쾌함이 우러나온다는 이야기다. “결국 책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자괴감이나 오만함 둘 중 하나만으로는 유머를 할 수 없어요. 결국 난 소중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역설적인 두 가지가 공존해야 유머가 가능하죠.”

김 교수는 유머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다. 이미 후속작으로 다양한 영역의 ‘유머리스트’들과의 대담을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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