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테크포럼 – 공부의 모든 것]

에듀테크포럼 회원사들이 돌아 가며 재능기부로 기고하는 글입니다. 다양한 사교육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독자들께 도움 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은 여성신문의 공식적인 의견과 무관합니다. <편집자 주>

세종이 학습지 교사라면? 

만5살짜리 조카가 가정학습지를 푸는 것을 보았다. A4 용지 반절 크기만한 학습지 상단에 짧게 서너 줄 정도 길이의 지문이 제시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간단한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지문은 그림에 대한 설명이었다. 하단에는 빈칸 채우기 문제가 제시되어 있었다. 지문에 나온 단어를 기억하면 답을 쓸 수 있는 문제였다. 언뜻 국어 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조금 세밀히 보니 과학 문제지였고 아쉬운 점이 보였다. 사물의 여러가지 면모에 대한 충분한 관찰과 무관하게 정해진 답을 쓰지 않으면 그냥 틀린 거였다. 내친 김에 몇달 치 ‘과학’ 학습지를 다 살펴봤다. 다 같은 방식이었다. 반짝반짝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이 왜 벌써부터 정답 맞추기를 해야 하지?

아동 학습지에 충격 받은 그날 이후, 인간과 교육에 대한 통찰을 찾아보고자 고전을 뒤적이다가 <세종실록>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병진년에 최해산이 도 안무사(都安撫使)가 되었을 때 달려와 보고하기를, ‘정의현에서 용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승천하였는데, 한 마리는 도로의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였는데,

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또 그 용의 전체를 보았는가? 그 머리나 꼬리를 보았는가? 다만 그 허리만을 보았는가? 용이 승천할 때 구름의 기운과 천둥과 번개가 있었는가? 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 하늘로 올라간 곳이 인가(人家)에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가? 구경하던 사람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또 몇 리나 되는가? 용 한 마리가 빙빙 돈 것이 오래 되는가, 잠시간인가? 같은 시간에 바라다본 사람의 성명과, 용이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적이 그 전후에 또 있었는가와, 그 시간과 장소를 그 때에 본 사람에게 방문하여 조사하고 아뢰도록 하라."(세종22년 1월 30일)

 

위 인용문은 현장중심 국정운영과 토론문화로 특징지어지는 세종 리더십 중에서 교육과 인재육성에 대한 시사점을 알아보고자 읽기 시작한 <세종실록>에서 내 눈길을 끈 한 장면이다. 질문으로만 가득한 이 대목이 등장하는 세종22년은 1440년이다. 당시 사람들은 용이 실존한다고 믿었을까? 용의 실존 여부에 대한 토론이 당시 실록에 몇 차례 나온다. 기록들을 살펴본 결과 세종은 용의 존재를 믿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존재 가능성은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그는 세상에는 본인의 앎의 영역 밖 미지의 가능성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겸허한 마음을 늘 깔고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자세가 기본이다 보니 외부 정보와 사안들에 대한 그의 반응에는 ‘건성으로’, ‘대충’, ‘고만고만하게’, ‘그러려니…’가 없었다. 물론 그는 구중궁궐 속에 사는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들의 정보왜곡을 늘 경계하는 게 습관화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보고에는 예민하게 반응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용의 출몰에 대한 ‘대략적인’ 보고를 가만히 들어 넘기지 않고 구체적 현장관찰에 기반한 사실확인(fact check)을 주문하는 이 대목을 읽으면 요즘 우리의 ‘카더라 가짜뉴스’를 돌아보게 된다.

그 날 이후, 나는 교육 콘텐츠나 롤모델을 발굴할 때마다 사물과 사안 그 자체에 대한 지식보다는 사람의 지적 ‘호기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질문하게 만들고, 관찰하게 만드는 태도인 호기심 말이다.

현장에서 직접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세종의 교육이다.
@Pixability 현장에서 직접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세종의 교육이다. 

만약 세종이 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학습지를 디자인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세종은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찰하는 태도를 키우는 데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오늘의 과제: 오늘 본 것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이나 신기했던 것을 그려보세요. 그리다 잘 생각이 안나면 다시 보고 와서 자세하게 그리세요. 만약 직접 또 보러 가기 어려우면 사진을 보고 그려도 됩니다. 본 것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고, 궁금한 것은 그냥 넘어가지 말고 몇 번이고 자세히 관찰하고 그려 내세요.

그림을 완성한 후 선생님께 본인의 그림을 설명하고 질의 응답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지도 선생님 가이드; 그림의 세부 사항, 아주 사소한 요소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아이가 관찰과 설명을 구체적으로 자신 있게 하도록 격려하세요.”

요즘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주고 먹기 좋게 씹어준 콘텐츠만 소비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궁금해하고 관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무덤덤하게 사는 것이 보통이다. 안타깝게 반복되는 크고 작은 사고들 역시, 평상시 주변 사람과 사물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챙기지 못한 탓에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호기심과 관찰보다 ‘대략의 감으로 정답 맞추기’에 최적화된 체질을 만들어 놓고 창의적 문제해결을 요구하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교육엔, 평생에 걸쳐 지적 호기심과 관찰력 유지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이 단계는 물론, 지식과 경륜을 겸비한 노숙한 단계에서도, ‘기존 경험에 비추어 아는 척’ 하지 않고 현장과 사실을 겸허하게 관찰하는 호기심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도록 다양한 교육과 콘텐츠가 도와 주길 기대해 본다.

 

권혜진.

프리미엄 에듀·컬처 콘텐츠 기획사 세종이노베이션 대표. 리더십, 문화, 기초학문 분야 고급 콘텐츠에 집중하고 있으며 실록학교, 세종의 식탁, 품격경영아카데미, 이동건게임연구소 등을 육성 중이다. contact@withsej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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