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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산골소녀 같은 첫 인상이었다. 작고 평범한 외모에 음성도 나직하고 조심스런 태도가 어쩐지 도시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숲 속의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자기 삶의 장을 열어젖히며 오늘 이 자리까지 왔다.

직업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후평1차 현대아파트 관리소장이지만 신용자(50)씨는 너무도 다채롭고 신나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춘천 여성민우회’ 창립회원이며 올 봄학기부터 강원대에서 부동산학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고, 대한주택관리사 협회에서 ‘전국 최초’로 강원지역 ‘여성 지역회장’으로 선출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97년부터 지인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해 지금까지 <메주와 첼리스트>, <태권도와 나>, <서비스에 승부를 걸어라> 등 20여 종의 책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춘천에서 강의중인 대산 김석진 선생한테서 주역을 공부하고 있다. 1년 반 과정인데 인터넷에서 우연히 풍수 강의를 듣고 호기심을 느껴 앞으로 동양사상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볼 작정이라고 한다.

두 살 연하의 남편은 춘천기능대학 전기과 교수인데 아내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무조건 지지하는 ‘열린 남자’이다. 서른 한 살에 결혼해 딸 어진(성균관대 2학년)이와 아들 준수(춘천고 2학년)를 두고 있다. 딸은 불어를 잘해 곧 프랑스로 유학 갈 예정이고 아들은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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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의 어려움 딛고 석사과정까지

그렇다면 이 작은 여자가 평범한 가정에서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일까? 대답은, 전혀 아니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이라는 오지에서 세 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큰언니의 병환과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여고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암사동에 있는 ‘빠이롯트’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남들이 교복 입고 학교 갈 때 저는 공장으로 출근했습니다. 일 끝나고 저녁에만 학생이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었어요. 항상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어느날 계장님이 ‘나중에 책을 쓰면 내 얘기도 꼭 넣어달라’고 하더군요. 아마 먼 훗날 제가 책을 쓸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20대의 어려운 시기를 독서하는 힘으로 버텨 냈습니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바지를 살까 책을 살까 고민하다 헌책방에 가서 한아름 책을 들고 오며 가슴이 뿌듯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독서만이 나를 지켜주는 자존심이었지요. 월급 타면 무조건 10프로는 나를 위해 투자했으니까요.”

한국방송대학 가정과를 거쳐 78년 춘천 농민교육원 분원에서 보건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 후 당시 처음 실시된 강원일보 교열전문직 시험에 응시해 신문사에서 일했다. 지역 신문사라 일손이 부족해 취재에서 교열, 신문제작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해 신문, 잡지 만드는 일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 와중에 둘째 애 낳고 한 달도 안 돼, 부기도 채 안 빠진 상태에서 공부하러 다녀 38세의 나이에 강원대학 행정대학원에서 부동산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춘천시민의 주거의식 및 주거수준에 대한 연구를 석사논문 주제로 삼았고 그때도 부동산학 전공자 가운데 ‘최초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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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부터 ‘내 스스로 실패했다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어요. 사실 제가 참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많이 했는데도 이제까지 ‘신경질 난다’ 혹은 ‘짜증난다’, ‘지겹다’ 그런 말들을 해본 적이 없어요. 삶은 한순간 한순간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인생에 대한 이렇듯 크나큰 긍정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스물네 살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20대초, 생태주의 영향으로 농사일 시작하기도

스물넷이던 1976년 4월 어느 날, 그녀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가장 친한 친구 영자와 함께 깊은 산 속으로 ‘출가’를 했다. 그냥 집 나가는 것은 ‘가출’이고,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것은 ‘출가’라고 그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이자 오늘날까지도 생태주의자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저서 ‘숲 속의 생활’이 그녀들의 경전이었다.

“산 속에서 태초의 인간으로, 야성의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어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겸허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 싶었지요. 인간이 최소한의 필요조건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반찬으론 딱 소금 한 말 가지고 갔어요. 그곳에서 율무, 엘더베리, 양봉 등 온갖 농사일을 다하며 2년 동안 살았는데, 그때의 경험이 평생 저를 지켜준 생명력입니다”.

그 당시의 일기에는 순수하고 야성적인 처녀의 결연한 의지가 날카롭게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단 한번의 삶을 초대받은 지상에서 가끔씩이나마 선택하는 모험을 꿈꾼다.

생존의 의미는 안일과 평온, 풍요 속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진지한 대결과 격정, 절망 속에서 찾아질 것이다... 가고 오는 것, 그 사이에서 난 그냥 살고 늙고, 죽고, 그게 끝인가? 자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며 생의 예지를 배우고 싶다, 일체의 문명혜택을 거부하고 원초적으로 필요한 것만으로 건강하게, 소박하게 살아볼 작정이다.’

주변사람들이 다 뜯어말렸어도 두 처녀의 마음을 돌릴 순 없었다. 그녀들은 화전 정리사업으로 버려져 있던 땅,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외약사와 안약사의 중간쯤에 있는 산밭을 개간해 볼 생각으로 간단한 살림도구만 챙겨 짐을 꾸렸다. 그러나 막상 그 산골로 들어가려니 제일 먼저 ‘집문제’가 부딪쳤다. 최소한 집이 있어야 밥도 해먹을 게 아닌가. 그녀들은 남대문시장에 가서 24인용 하늘색 대형천막을 6만원 주고 구입해 산 속에다 치고, 집으로 삼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소유 당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 모든 편리한 생활용품과 온갖 책으로 무장된 지식세계까지 전부 철저하게 부정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옷도 여름옷 두 벌, 겨울옷 두 벌, 딱 두 벌씩만 들고 갔지요. 도시의 삶을 박차고 자유로운 인간본성대로 살고 싶어서요. 일기예보를 듣기 위해 가져간 라디오만이 우리가 소유했던 유일한 문명의 이기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노동을 기다리는 3천 평의 너른 묵밭마저도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로 부딪치는 광활한 대지의 불꽃’처럼 느껴져 온몸으로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보자면 이 정도면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고 볼 수 있겠지만 꿈이 있었기에 엉뚱한 짓을 시도할 수 있었고, 그 일탈의 한가운데서 놀랍고 신비한 생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엉성하게 천막을 쳐 집을 만들고, 둘이서 버너와 코펠로 저녁을 해먹고 자리에 누었다. 비장한 각오와는 상관없이 밤이 되자 추위가 엄습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추위에 두 처녀는 밤새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그 뒤 근처의 유일한 민가였던 은배네 집을 찾아가 구들 놓는 법을 배워 천막 안쪽에 구들과 아궁이를 만들었다.

“처음 하는 농사일이라 가장 쉽게 지을 수 있다는 콩, 메밀 농사를 시작했어요. 콩농사엔 비료도 별로 필요 없고 해충도 달라붙지 않으며 뿌리혹박테리아가 있어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메밀은 중복 때 심어 40일 후면 수확이 되고, 김도 맬 필요 없는 화전곡식이라고 했구요. 농사철을 몰라 은배엄마한테 절기를 물으면, ‘이팝꽃이 피면 부치미를 시작할 때라 감자를 심으라’고 했고, ‘뻐꾹새가 울면 콩을 심을 때’라고 알려줘 놀라기도 했습니다. 문명의 시계와 자연의 시절은 분명 다르구나, 싶었지요.”

아파트 관리소장에 여성진출 기대

처음 해보는 노동이라 밤마다 뼈가 아작댄다느니 삭신이 쑤신다느니 하면서도 그녀들은 스스로를 대견해 했고 차츰 농사일도 손에 익어갔다.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나 산 위에서 맞는 맑고 싸한 공기와 떡갈나무 숲의 푸르른 신록, 상쾌한 바람, 허공 같은 하늘... 모든 게 생생히 살아 있는 자연 그 자체에 감격하고 황홀해 했다. 신씨는 그때 비로소 ‘새소리를 공짜로 들으려느냐’는 시 구절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솔잎, 진달래, 산딸기, 팥배, 아가위, 아카시아, 오디, 머루 등으로 틈날 때마다 술을 담가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거나 하루 일을 마치고 남폿불을 켠 그림자 진한 밤에 개봉을 했다. 그때의 호젓하고 무량한 촌음의 깊이를, 그 도시 밖의 산중생활의 행복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산골생활의 경험을 글로 써 91년 9월, <월간중앙>의 1천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다.

“삶의 양이 아니라 존재의 의지와 체험으로 풍성해진 ‘삶의 질’이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의 나이를 따지는 것이 부질없다고 봐요.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문제이니까요.”

그곳에서 2년 생활한 뒤 하산하여 지지고 볶으며 살다 신씨는 92년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취득, 98년 8월부터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직원만도 14명인데, 여자 소장으로서 권위주의가 아닌 부드럽고 원만한 일처리로 직장에서 ‘좋은 소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국 주택의 대다수가 아파트이고, 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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