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공연 속 주목할만한 여성 캐릭터

우연일까? 아니면, 세상의 변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인가?

요즘 페미니즘 성향의 공연예술 작품이 눈에 띄게 많아지면서 드는 궁금증이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고, 공연계가 그에 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올해는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거나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을 그린 작품의 수가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시공간 배경이 각기 다른 여러 작품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또 저항하다 스러져가는 여성 캐릭터들을 부각하며 깊은 감동과 아픔을 안겨주었다. 몇 작품을 예로 들어본다.

실존 인물로서 불과 41세의 나이에 스파이 죄로 처형당한 네덜란드 여성의 삶을 다룬 국립발레단의 ‘마타하리(Mata Hari)’는 대표적 사례. 레나토 자넬라 안무로 10월 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여성의 욕망을 당당하게 추구하다 스러져간 한 여인의 삶에 초점이 맞춰졌다. 많은 사람이 흔히 알고 있는 ‘미모의 전설적인 이중스파이’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여성해방과 자유로운 삶의 쟁취 대가로 마타하리가 자신에게 내려진 총살형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국립발레단의 '마타하리' 중 한 장면. ⓒ국립발레단 제공
국립발레단의 '마타하리' 중 한 장면. ⓒ국립발레단 제공

헨릭 입센 작 ‘인형의 집’은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환기해온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페미니즘 연극의 고전. 이전의 많은 '인형의 집'과는 달리 유리 부투소프 연출의 신작(11월, CJ토월극장)은 첫 장면부터 주인공 노라의 당당한 태도를 부각했다. “네, 맞아요. 전 남편을 속였어요.”라는 첫 대사에 이어 노라는 “하지만 그건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어요.”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이어 두 번째 장면에서는 노라의 남편이 아내를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연극 초반에 곧바로 노라가 가정을 박차고 나선 것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 같은 느낌의 연출을 한 점이 특별했다.

국립창극단이 주로 젊은층을 타깃으로 올해 내놓은 ‘신창극 시리즈’는 2편이 모두 호기심 많은 소녀의 용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소리꾼이며 연출가인 이자람이 프랑스의 구전동화 '빨간 망토'를 모노드라마 창극으로 꾸민 '소녀가'(3월, 자유소극장)는 한 소녀가 숲에 들어갔다가 위기를 맞게 되나 기지를 발휘해 슬기롭게 빠져나온다는 이야기. 김태형 연출의 '우주소리'(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원작, 10월, 달오름극장)는 공상과학 창극으로 겁 없이 혼자 우주여행을 떠난 16세 소녀가 외계의 생명체와 함께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2편 모두 여성이 주체적인 결단력으로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넌지시 드러냈다.

연극 '인형의 집' 중 한 장면. ⓒ예술의 전당 제공
연극 '인형의 집' 중 한 장면. ⓒ예술의 전당 제공

 

창극 '우주소리' 중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창극 '우주소리' 중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올해 중요 공연물 중 기존의 서구 작품을 기반으로 한 발레, 연극 등은 내용이 여성해방이나 여성 주인공의 용기, 강인한 성격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들이었다. 이에 비해 국내 창작극들은 여성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더 부각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극단 몸소리말조아라 제작의 '목욕합시다'(10월, 문래예술공장)와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9월, 혜화동1번지)이 그런 사례다. 조아라 배우의 1인극인 '목욕합시다'는 '몸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분노와 고통을 애절하게 표현했다. 씻김굿 형식을 빌려 폭력과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아픔을 씻어낸 작품이다. 김수정 연출의 '공주들'은 '예쁜'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지배논리와 상황논리에 따라 일본군, 국군, 미군을 위해 몸을 내어주고, 외화벌이의 전선에 서야 했던 '공주들'의 참담한 모습을 그렸다.

 

연극 '공주들' 중 한 장면. ⓒ강일중 제공
연극 '공주들' 중 한 장면. ⓒ강일중 제공

안산문화재단과 국립극단이 공동제작, 10월과 11월 각각 안산과 서울에서 선보였던 '텍사스 고모'(윤미현 작/최용훈 연출)도 비슷한 사례. 작품은 더욱 나은 환경을 찾아 국제결혼을 통해 해외로 이주한 여성이 겪는 고통을 시리게 묘사한다. 19세의 키르기스스탄 여성은 "한국에 가면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충북의 한마을에 사는 환갑 나이의 남성에게 시집온다. 이 여성은 밭에 나가 일하라는 남편의 말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저항하나 결국 폭력 앞에 굴복하고 만다.

연극 '텍사스 고모' 중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텍사스 고모' 중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막 공연이 끝난 서울시극단의 '사막 속의 흰개미'(황정은 작/김광보 연출, 세종S씨어터)는 최근 한국 사회의 큰 이슈로 등장한 그루밍 성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극중 지한은 15년 전 겪었던 악몽 같은 사건의 현장인 마을교회 목사의 고택을 찾는다. 그는 자신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던 목사로부터 목사직을 세습 받은 아들에게 얘기한다. "우리 딸이 올해 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요. 그거 알아요? 여덟 살은 뭔가를 본격적으로 기억하는 나이래요. 그렇다면 좀 더 좋은 기억을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내가 좀 더 잘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매어 있는 건 난데, 딸 아이를 보니, 미래가 매어 있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하는 건 그거 하나에요. 나와 내 가족의 미래. 그래서 왔어요." 담담하지만, 절규가 담긴 지한의 대사는 아리기 그지없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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