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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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현대극장 초연 이후 15년만에 막을 올린 연극 <19 그리고 80>은 여러 면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두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죽음을 쇼처럼 즐기는 19세 청년 해롤드(이종혁 분)와 80세에도 인생의 아름다움에 울고 웃는 노인 모드(박정자 분)의 경계 말고도 듬성듬성 철근이 드러난 채로 극장 내부를 가로지르는 시멘트 기둥과 무대 한 쪽에 서 있는 키 큰 하얀 나무가 연출하는 묘한 부조화의 미는 미완성인 채로 극장을 꾸민 정미소만의 프롤로그(서막)처럼 느껴졌다.

모드는 아이들 만화에 등장하는 호호 할머니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매일 매일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라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시청 앞에서 매연을 숨쉬고 사는 나무가 천식에 걸릴까봐 둥치째 뽑아 숲에 옮겨 심는가 하면 “사람들은 왜 그리 가둬두는 걸 좋아하지”하며 동물원의 바다표범을 바다로 보내준다. 만물에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드에게 금지와 규율은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도통 일반적 상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모드의 생활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이란 바로 죽는 일이라 생각하는 청년 해롤드의 우울한 삶에 유쾌한 균열을 만들어 준다.

이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장소는 장례식장. 영원한 삶이란 없다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지지만 자연은 다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사실, 이런 엄연한 사실 속에서 모드는 해롤드에게 그가 모르고 살았던 많은 자유를 가르친다.

해롤드의 자살 체험이 천부적이고 독창적이라고 인정하는 모드는 그러나 이 세상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많으며 그것을 보고 느끼고 즐기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에이즈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미국의 작가 콜린 히긴스의 시나리오 <헤롤드 앤드 모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71년 영화로 만들어진 <해롤드 앤드 모드>는 컬트영화의 고전으로 지금도 미국과 캐나다에서 상영중인 작품이다.

1987년 김혜자, 김주승이 열연해 관객의 찬사를 받았던 이 작품은 초연 이후 연기자 박정자 씨가 15년간 늘 마음속으로 꿈꿔왔던 역할이기도 했다.

15년간 꿈꿔왔던 응축된 열기가 명랑하고 유쾌하고 너무도 귀여운 할머니를 탄생시켰음이 분명하다. 항상 무대를 압도했던 박정자식 카리스마는 어느덧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부드러움으로 변화돼 잔잔한 감동이 객석 곳곳을 흔들어 놓았다.

해롤드와 모드의 사랑은 흔히들 말하는 남녀의 사랑이 아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퇴역 중령 알 파치노가 자신을 돌봐주는 아르바이트생 크리스 오도넬의 정신적인 아버지가 되어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고 <파인딩 포레스트>에서 괴팍한 작가 포레스트가 흑인 고등학생 자말 윌레스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해내고 성장시켜 주었던 것처럼 인생의 혜안을 지닌 모드는 해롤드에게 맑은 영혼과 인생의 작은 행복을 되찾아주는 영혼의 어머니였다. 그들의 키스가 인류 최초의 키스처럼 정결하고 고귀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는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 사랑 없이 어떻게 인간성이 회복되며 물질문명이 인간사회를 얼마나 부패시키고 있느냐는 문제, 인생의 가치관은 무엇이며 삶과 죽음은 무엇이냐는 문제를 이 작품 속에 담고 싶었다”는 연출가 장두이의 말처럼 이 작품은 많은 것을 관객들에게 남겼다

“난 아름다움을 보고 울어. 낙조라든가 갈매기를 보고...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 이 두 가지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 되는 걸 두렵게 느끼지 않는 거야...”(모드)

기간:2003년 1월 9일~3월 16일까지

장소: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문의:02-3672-3001

윤혜숙 객원기자heasoo21@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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