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숙씨가 15일 서울 중구 서울클럽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후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양정숙씨가 15일 서울 중구 서울클럽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후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터뷰]

‘로봇다리’ 전 수영선수
김세진 어머니 양정숙씨
생후 5개월 선천성 무형장애
세진이 공개입양

9살에 해발 3870m 로키산맥 등반
11살에 아시아, 13살에 세계 신기록
15살에 성균관대 최연소 입학
목표는 유엔난민기구서 일하는 것

“걷는 것보다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게 중요
못 일어났을 때
손 내미는 것도 용기”

 

“다리 한쪽이 없는 의자가 어떻게 똑바로 설 수 있을까요? 반대쪽에 수많은 풍선들이 그 무게를 지탱한다면 평형을 맞출 수 있겠죠. 소수를 위해 세상이 돌아갈 순 없겠지만 다수가 소수를 끌어안으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천성 무형장애로 태어난 김세진(22)군은 두 다리와 오른쪽 손이 불편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재활치료 때문에 수영을 시작해 11살에 자유형 400m 아시아 기록을, 13살엔 자유형 800m 세계기록을 세웠다. 2011년 뉴욕 허드슨강에서 열린 10km 장거리 수영에서 18세 미만 1위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선 장애인 수영 꿈나무와 성화를 봉송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옆엔 항상 그를 응원해주는 어머니 양정숙(50)씨가 있다. 보육시설로 봉사활동을 다니던 그는 생후 5개월 된 세진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개 입양했다. 이후 그는 여자가 아닌 오로지 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의 삶만을 살았다. 

“걷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걷다가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게 중요해. 못 일어났을 때 손을 내미는 것도 용기야.” 양씨는 세진이를 끊임없이 넘어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과정에서 세진이는 혼자 일어나는 법을 터득했다.

“10km 장거리 수영에 도전하기 위해 수영장을 찾았지만 세진이를 이끌어 줄 코치, 감독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뉴욕 허드슨 강까지 갔지만 16살의 어린 아이가 비장애 선수들과 시합을 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통지를 받았죠. 하지만 계속된 설득과 간절한 요청 끝에 결국엔 출전을 허가하더군요.”

이후 세진이는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에 나가고 싶다는 목표를 가졌다. 양씨는 아들의 꿈을 위해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국제 수영연맹 회장 등에게 직접 자필 편지를 썼다.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그는 예선 전체 70명의 선수 중 51위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5위 안에 들지 못해 리우올림픽 출전은 못 했지만 비장애인 선수들과 겨뤄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엄마 나는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야.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내 몫이야. 내 역할에 충실하고 싶어.”

두 다리가 없어 매일 넘어지던 아이는 이제 키 185cm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한국뉴욕주립대 송도캠퍼스 경영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소화하고 있다. 또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을 위한 수영 코치로 자원봉사에 나간다. 그의 최종 목표는 유엔난민기구에서 일하는 것이다. IOC위원장, 보육원 원장 등이 되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 또한 변함이 없다. 

양정숙씨와 아들 김세진군 ⓒ양정숙씨 제공
양정숙씨와 아들 김세진군이 대학교 입학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양정숙씨 제공

 

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의 철학

“장애인이라고 대접받으려고만 하면 안 돼요. 장애인들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이뤄나가야죠.”

양씨는 세진이가 대접받으려는 자세 대신 스스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장애인이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아들에게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살 세진이가 로키산맥을 등반한 것이 대표적인 일화다. TV 속 엄홍길 대장의 히말라야 등반을 본 세진이가 등반이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 양씨는 안 된다는 말보단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주목했다. 그 결과 KBS 특집 방송을 통해 세진이는 해발 3870미터의 로키산맥을 등반할 수 있었다.

아들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의 대답은 늘 ‘할 수 있다’였다. 그럴수록 세진의 마음속엔 다양한 꿈이 생겨났다. 수영, 드럼, 기타, 스키, 승마, 댄스 등 어릴 때부터 안 해 본 취미 활동이 없을 정도였다.

“드럼을 가르치기 위해 대전에서부터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까지 왕복 6시간을 운전한 적이 있어요. 강원도 용평까지 스키를 배우러 다닌 적도 있고요. 용인에서는 승마를, 서울 역삼동에선 라틴댄스를 배웠었죠.”

그가 50분 수업을 받기 위해 왕복 6시간을 써야 했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장애 아동들을 위한 교육의 질이 이전보다 향상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세진이 또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어린이집 입학을 13번이나 거절당해야 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입학 또한 4~5번 거절당하며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현관문 밖을 못 나가고 있더라고요.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지옥’이 있을 것 같다고. 그 말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럴수록 세진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무엇보다 꿈이 있다면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뛰어들라고 끊임없이 강조했죠.”

수영선수로 활동할 땐 장애인 체육특기생을 위한 규정이 따로 없어 시합을 가는 일정이 모두 결석으로 처리됐다. 그래서 세진이는 혼자 검정고시를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중학교 과정 4개월, 고등학교 과정을 3개월 만에 이수했다. 이후 ‘장애인특례입학’ ‘사회배려대상자’ 없이 성균관대를 4년 장학금으로 15살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입학했다. 4학년 1학기 평점이 4.5만점에 4.24일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양정숙씨와 아들 김세진군 ⓒ양정숙씨 젝오
양정숙씨와 아들 김세진군 ⓒ양정숙씨 제공 

 

아버지의 교훈 
“용서하라”

지난 2013년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 ‘여성 특별전시전’에선 한국 근대사의 위대한 어머니 4명을 조명했다. 이 4명 안에는 양씨도 포함돼 있다. 양씨 외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전태일 여사의 어머니, 음악가 정트리오의 어머니 등이 한국 근대사의 위대한 어머니로 선정됐다. 생존해 있는 인물은 양씨가 유일하다. 전시전엔 세진이의 영상과 양씨의 일기와 사진 등이 전시됐다.

양씨가 위대한 어머니가 되기까진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약 유통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선 쉰이란 늦은 나이에 저를 낳았습니다. 출산 과정에서 어머니는 노산으로 돌아가셨고요. 아버지께선 일주일에 한 번씩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칭찬을 듣고 올 것, 스무 살이 되면 집을 나갈 것 두 가지를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스무 살이 되자 실제로 재산포기각서를 쓰게 하셨고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셨죠.”

세진이를 입양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눈물을 보였다. 장애인의 어머니로 살아갈 자식의 삶이 평탄치 않으리란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고한 의지를 가진 양씨에게 아버지는 세 가지를 지킬 것을 당부하며 입양을 허락했다. 첫째, 누구 앞에서도 여자가 되려고 하지 말 것. 둘째, 가장 잔인한 복수는 용서다. 그러므로 세상에 맞서지 말 것. 셋째, 자식은 네 몸에 붙은 그림자다. 자식이 너를 보고 무엇을 배울지 먼저 생각할 것.

“세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6학년 형들이 교구형 망치로 아이 다리를 깨부순 적이 있어요. 학교에서 집까지 기어왔는데 살이 찢어져서 피가 철철 나는 거예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학교로 달려갔어요. 이 아이들을 때려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순간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죠. 결국 아이들을 용서하고 내일 아침 꼭 세진이에게 사과해달라고 부탁했죠. 이후 아이들은 세진이를 보호해주는 형들이 됐어요.”
 

양정숙씨와 아들 김세진군 ⓒ양정숙씨 제공
양정숙씨와 아들 김세진군 ⓒ양정숙씨 제공

 

시야 넓히면
분명 내 편 있어 

양씨는 홀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해 왔다. 아이 수술을 위한 병가 등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야간 대리운전이다.

“취한 손님이 머리를 쥐어박더라고요. 왜 여자가 대리운전을 하고 있냐고. 집에 데려다주고 돈도 못 받는 경우도 많았어요. 새벽 3~4시에 대리운전이 끝나면 고급 아파트 단지에 가서 외제차 외부세차를 했죠. 그게 끝나면 공공기관이나 도서관, 대형교회 복도, 화장실 청소 일을 하면서 아이들과 살았어요. 가난했고 돈이 없었죠.”

하지만 양씨는 가난은 불편한 일일 뿐 불행은 아니라고 말한다. 엄마로서 사는 행복이 더 컸기에 자신은 절대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불만’이 많아서입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내가 세상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는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부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용기라고 말했다. 

“대문 밖은 지옥이죠.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지옥의 방향만 째려보고 사는 건 아닐까요? 조금만 방향을 넓혀보면 분명히 우리의 편이 돼주는 사람들, 우리와 뜻을 함께해주려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분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저는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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