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 열린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의 행사의 포토월 앞에서 행사의 기획 및 총 감독을 맡은 박이슬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 열린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의 행사의 포토월 앞에서 행사의 기획 및 총 감독을 맡은 박이슬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터뷰]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박이슬 감독 

조명이 꺼지고 음악이 흐르자 모델들이 워킹을 시작한다. 사이즈 44부터 100 이상, 키 150cm부터 170cm가 넘는 다양한 사이즈의 모델들이 차례로 런웨이에 등장한다. 일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여성이라는 쇼 컨셉에 맞게 당당한 발걸음과 카리스마 있는 표정은 필수. 완벽한 워킹은 아니지만 자신감만큼은 전문모델을 능가한다. 30분간의 쇼가 끝나자 관객석에선 힘찬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긴장이 풀린 모델들의 입가에도 그제 서야 환한 웃음이 번진다.

10일 서울 홍대 연희예술극장에선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가 열렸다. 지난 9월 전국 각지에서 패션쇼 소문을 들은 수많은 지원자들이 오디션을 위해 서울을 찾았고, 사이즈 상관없이 다양한 모습을 가진 여성들이 최종 모델로 뽑혔다.

이날 77 사이즈 모델로 무대에 오른 박민선(26)씨는 “평소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해 연극, TV 광고, 웹 드라마 등에 출연하고 있다”면서 “무대에 설 때 항상 내 몸이 어떻게 보일까 봐 신경 쓰였는데 오늘만큼은 자신감 있게 무대 위에 올랐다”고 말했다. 관객 배효인(24)씨는 “어색하면서도 당당한 모델들의 모습이 뭉클하고 감동을 줬다”고 전했다.

국내 최초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를 기획·주최한 주인공은 바로 박이슬(24) 감독이다. 지난해 기획을 시작해 모델 선정부터 패션쇼 총괄 감독까지 모두 맡았다. 그는 국내 1호 66~77 내추럴 사이즈(Natural Size) 모델이자 패션 유튜브를 운영 중인 유튜버 ‘치도’이기도 하다. 다양한 패션 팁을 제공하는 영상 외에도 다이어트 강박증, 섭식장애, 사이즈, 바디 포지티브 등의 이슈를 다루며 2만명이 넘는 구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박 감독은 “정형화된 몸이 아닌 다양한 몸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를 개최했다”며 “키 165cm, 몸무게 62kg인 제가 모델을 지원하면 매번 ‘그런 사이즈의 모델은 애초에 뽑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세상엔 44, 55 사이즈 말고도 다양한 사이즈와 몸이 있다. 따라서 다양한 사이즈를 대변할 모델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쇼를 통해 내추럴 사이즈 모델의 존재를 알리고, 모델에게 요구되는 정형화되어 있는 ‘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써보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1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에서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이 열려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고 있다.
1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에서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이 열려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기자 
생활 밀착 패션 유튜버 치도로 활동 중인 박이슬 감독의 영상 ⓒ유튜브 캡처
생활 밀착 패션 유튜버 치도로 활동 중인 박이슬 감독의 영상 ⓒ유튜브 캡처

 

인생의 절반이 다이어트
강박 멈추니 오히려 살이 빠졌다

박 감독은 모델이라는 꿈을 위해 10년이 넘도록 수많은 다이어트를 하며 강박증과 섭식장애를 앓았다. 학창시절 최대 80kg까지 쪘고 대학 입학 후엔 60kg대를 유지했지만, 자신이 가진 몸을 미워했고 부정했다. 오로지 살을 빼야만 모델로 성공하고 행복한 인생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제가 아는 세상에서 모델에게 마른 몸은 필수였어요. 학창시절부터 폭식증을 앓던 대학생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다이어트를 하며 보냈죠. 원푸드(One-Food) 다이어트부터 황제 다이어트까지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었어요.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고 헬스장, 수영장, 복싱장에도 다녔죠.”

대학교 졸업이 다가오고 진로 고민이 깊어지면서 박 감독은 더 강도 높은 극한의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헬스장 문을 열고 하루 2~3시간을 꼬박 운동에 썼다. 초절식으로 식단도 조절했다. 하지만 거의 굶어서 빼다시피 한 살들은 폭식과 초절식을 반복하며 악순환의 굴레를 걸었다.

“식욕은 늘 저의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요소였어요. ‘내가 언제 이걸 다 먹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폭식을 했으니까요. 어느 날은 치킨 한 마리를 시켰는데 눈 깜짝할 사이 다 먹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먹고 나면 늘 자기혐오감이 몰려왔어요. ‘남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박 감독은 살기 위해 다이어트를 그만뒀다. 1년간 휴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던 어느 날 ‘내가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온전히 나의 몸을 사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거울을 보며 ‘지금 이 모습도 괜찮아’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식욕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괴로운 것도 제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먹고 싶은 것도 맘껏 먹었죠.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니 신기하게도 제 모습이 정말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어요. 마음이 편안해지니 식욕도 줄고 수영, 등산 등 운동에 취미가 생겨 오히려 살이 빠졌어요.”

1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 열린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의 전시회장에서 행사의 기획 및 총 감독을 맡은 박이슬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0일 서울 연희동 연희예술극장 열린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의 전시회장에서 행사의 기획 및 총 감독을 맡은 박이슬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내추럴 사이즈 모델 많아져야
“마른 것이 예쁘다” 미의 기준 바뀔 것

박 감독은 최근 식이장애를 겪을 당시 찍은 사진을 봤다. 놀라울 정도로 정말 괜찮은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미의 기준 또한 결국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정말 많은 사람이 그와 똑같은 이유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 적당한 몸무게의 마른 친구들까지 폭식증과 식이장애를 앓고 있다며 고백을 해왔다.

“미의 이상적인 기준 또한 결국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런웨이를 보면 온통 44 사이즈의 모델들뿐인데 다른 사이즈의 모델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이 들까요? 저와 같은 내추럴 사이즈의 모델이 계속해서 등장한다면 언젠간 사람들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요.”

165cm 62kg, 엉덩이둘레 100cm. 그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의 사이즈와 체형을 거침없이 공개한다. 또 다양한 사이즈의 옷을 활용한 코디 법도 공유한다. 처음 몸무게와 신체 사이즈를 공개하기까지 사람들의 반응이 두렵기도 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멋있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사고 싶은 옷의 정확한 핏을 알 수 있어 좋다’ ‘이런 사이즈의 모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등 사람들의 공감도 들려온다.

박 감독은 “활동을 하면 할수록 한 체형이 모두를 대변할 순 없다는 사실에 확신이 들었다”며 “오디션을 위해 모델들에게 워킹을 부탁했는데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끼가 대단했다. 이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모델이라는 개념 자체도 사회 맥락에 따라 분석되고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 바지 30 넘는 거 입어요’라고 말할 때가 있었는데 너무 속상했어요. 앞으로 더 다양한 몸, 더 다양한 사이즈의 모델이 활발히 활동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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