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력'을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해온 신화 앞에서 '펜은 곧 페니스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해야 했던 여성의 역사는 길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규정하는가'라는 권력에 대한 물음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항변도 이미 존재한다. 이 코너에서는 '여성-창작-새로움'의 의미망을 확장·갱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동시대 젊은 여성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여성신문이 공동 기획한 이 인터뷰는 문화연구자 오혜진과 만화평론가 조경숙이 함께 총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여성-창작’을 말하다⑦]
공연기획자 고주영 PD와 연극협력체 ‘여기는 당연히, 극장’을 만나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기획자 고주영, 연출가 구자혜, 사운드디자이너 목소, 배우 이리가 지난 8월 11일 서울 성북구 ‘혜화동 1번지’ 연습실에 모였다.
공연기획자 고주영,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연출자 구자혜, 사운드디자이너 목소, 배우 이리가 지난 8월 11일 서울 성북구의 연습실에 모였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집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하 ‘여당극’) 페이지에 적힌 소개문구다. ‘젊은 팀, 실험적인 팀’으로 알려진 연극집단의 슬로건 치고는 좀 평이한가? 장안의 문제작 <가해자탐구>를 봤을 때는 갸웃했고,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를 들썩거리게 한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을 보고는 열광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블랙리스트, 퀴어페미니즘…. 거의 모든 동시대 이슈에 두려움 없이 말 거는 이 집단은 뭔가. 한여름 지하연습실에 10인의 ‘여당극’ 멤버 중 연출자 구자혜, 배우 이리, 사운드디자이너 목소 3인이 모였다. 이들과 어울리는 플랫폼을 만드는 공연기획자 고주영 PD도 함께였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아니 ‘공장’?
혜진: ‘여당극’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공연 이력의 많은 부분은 ‘혜화동1번지’ 활동이던데요.
자혜: 2012년에 제 사비를 털어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라는 공연을 했고, 그때 멤버들과 계속 작업하면서 작품과 같은 이름의 느슨한 공동체가 만들어졌어요. ‘극단’이나 ‘조직’이라기보다는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의 협력체 정도로 생각해요. ‘혜화동1번지’는 연출자들의 연합체입니다. 저는 6기 동인으로 활동 중이고요.
주영: ‘혜화동1번지’는 매년 봄과 가을에 페스티벌을 열어서 동인들마다 작품을 만들어요. 2015년부터는 매해 ‘세월호 프로젝트’도 하고요. ‘혜화동1번지’에서 ‘여당극’은 4년 동안 9편을 만들었습니다.
이리: 저희끼리 ‘여기는 당연히, 공장’이냐며 농담할 정도죠.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미 했던 공연을 재공연할 때도 공연이 열리는 시기나 장소에 따라 매번 다르게 공연해요.
혜진: 그렇게 꾸준히 다작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서 생기죠?
자혜: 저는 저 개인의 미학과 고민에서 출발한 작업보다 외부에서 주어진 미션에 충실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걸 선호해요. 제가 생각지도 못한 주제를 해냈을 때 쾌감이 있어요. 그 주제가 다른 공연으로 이어지니 우리에게 편안한 정도의 속도감도 생기죠.

운동으로서의 문화 기획과 번역
혜진: 고주영 PD님은 ‘여성주의 문화 창출’을 표방한 ‘이프’에서 2004년 여성 전용 파티 ‘피도 눈물도 없는 밤’, 2005년 안티성폭력페스티벌 ‘porNO porNA’ 등을 기획하셨죠. 그간 작업의 연속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주영: 저는 페미니즘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진 않았어요. ‘이프’에서 활동하다가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에는 ‘하우징’, ‘주거정책’을 중심으로 집, 마을,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지금 진행하는 ‘안산순례길’ 프로젝트도 원래 안산거리극축제에서 독립국가를 세우는 기획이었어요. 그런데 축제 직전에 세월호참사가 발생했죠. 이듬해에 세월호참사를 성찰하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방향을 바꿨고, 올해로 4년째 하고 있어요.
혜진: 여성주의 웹진 <일다>에서 2005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158건의 일본 페미니즘 뉴스를 번역하셨죠. 일본희곡도 번역하시고요. 고PD님께 번역은 일종의 문화운동 같아요.
주영: ‘이프’ 이후, 페미니즘과 무관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이렇게 내 색깔 없이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일본어번역 자원봉사를 찾는다는 <일다>의 공지를 봤고, 온갖 백을 동원해 지원했죠. 처음엔 무급이었는데 지금은 번역료를 받아요. 어떤 뉴스를 번역할지는 주로 편집자가 정하고 저도 가끔 제안해요. 일본희곡은 제가 공연을 직접 보고 마음에 들 경우에만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합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기획자 고주영, 연출가 구자혜, 사운드디자이너 목소, 배우 이리가 지난 8월 11일 서울 성북구 ‘혜화동 1번지’ 연습실에 모였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기획자 고주영, 연출가 구자혜, 사운드디자이너 목소, 배우 이리가 지난 8월 11일 서울 성북구 ‘혜화동 1번지’ 연습실에 모였다.

 

언어를 날려버리고 싶은, 구자혜
혜진: 구자혜 연출님은 정통적인 연극계보 안에서 성장하셨지만, ‘실험적인 연극’을 한다고 평가되죠. 맞서야 할 연극계의 ‘전선’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업을 하다 보면, 자신이 정의로운 활동가가 된 걸로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연극을 통한 발언도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게 절대적인 가치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제가 처음 연극현장에 온 후, 1년 반 동안 소위 ‘선생님’들의 조연출을 맡으면서 연극계의 촘촘한 위계를 빠르게 흡수했어요. 지금 제 고민은 ‘작품에서 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는가’예요. 작품 속 세계가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굴러가는지 예민하게 파악하려 합니다. ‘전형적인’ 여성을 그리지 않으려다 보니, 오히려 여성 재현을 피하고 남성서사에 가까워진다는 비판도 받았죠. 아무튼 저는 이제 작품에서 특정 인물이 기능적으로 배치되는 상황이 좀 불편해졌어요.
혜진: 구자혜 작품은 대사가 참 많다는 인상을 주는데, 세월호 작품을 연출하시면서 ‘언어를 날려버리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더라고요. 언어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시나요?
자혜: 작품 속 인물이 현실의 관객에게 직접 말 거는 방식으로서의 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말이 그저 작품 속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라죠. 말이 정말 의미를 발생시키려면 연극이 구체적인 현실세계에 위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리: 구자혜 연출은 음악 나오면서 슬프게 걸어가면 사건이 발생하는 식의 관성적인 재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아요. 기존 연극언어를 흉내 내고는 이내 그것에 반박하는 장면을 보여주니 작품에서 언어가 두드러져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 보이거나, 너무 잘 보이는 ‘여성’ 연극인
혜진: ‘여성연출자’, ‘여성연극인’ 같은 분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혜: 한국 연극계에서는 연출자의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신진’이라고 부를 때가 많은데, 여성연출자에게는 특히 그런 것 같아요. 여성연출자와 남성연출자에게 기대하는 바도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여성연출자는 연극계보에 충실한 ‘잘 만든 드라마’를 넘어,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를 ‘도발적으로’ 다뤄야 관심 받는 듯해요. 또, 여성연출자들은 관심사가 다 달라도 ‘여성연출’이라는 범주로 묶여 홍보되기도 하죠. 진짜 피곤해요.
이리: 여성배우는 의미 있는 배역을 맡는 경우가 드물어요. 무대에 여성을 잘 등장시키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등장인물이 여성일 경우, 설명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결혼 여부, 자식 유무, 섹스에 대한 태도, 돈 버는 방편… 그래서 그냥 남성인물을 쓰죠. 남자는 설명이 필요 없는 ‘기본형’이니까. 무대에 장애인을 등장시키려면 장애에 대해 공부해야 하잖아요. 일이 많아지죠. 그러니 장애인 설정을 꺼려요. 무대가 보수적인 공간으로 간주되는 이유입니다. 등장인물은 특정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기호’가 되고, 여성은 그런 기능적인 역할을 하죠. 그런데 이건 바꿔 말하면, 그 관습을 뒤집을 때 무대는 굉장히 도발적인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목소: #MeToo 이후 여성연극인들이 가시화되는 걸 실감해요. 작업환경은 편해졌죠. 전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소통한달까요?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덜 하니까요.

무대 위 커밍아웃, 커밍아웃의 무대
혜진: 올해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본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한 편의 스탠딩코미디처럼 유쾌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가난한 여성연극인이자 번역가, 레즈비언이자 채식주의자로 사는 배우 이리의 소수자성에 대한 곡진한 자기서사였죠. 목소 님도 작년에 청소년극 <좋아하고 있어>의 프로그램북에 쓰신 글로 커밍아웃을 하셨고요. 여성이 타자로 간주되는 연극계에서 그런 자기지시적인 작업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이리: 2016년에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페스티벌에서 초연될 때의 주제는 ‘주거’였어요. 제 옥탑방에 놀러온 구자혜 연출이 제가 옷장 없이 트렁크에 옷을 쌓아 놓은 걸 보고 공연을 제안했죠. ‘여성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돈 문제이기도, 안전 문제이기도 했어요. 공연 연습할 때가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즈음이었습니다. 퀴어 이슈는 공연을 하면서 점차 강화됐어요. 그 작품을 하면서 비로소 커밍아웃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했어요. 페이스북에. 그 결과, 같은 작품이지만 커밍아웃 이전 버전과 이후 버전의 이야기가 좀 달라요.
목소: ‘연극인’보다 우선시되는 제 정체성은 ‘퀴어 페미니스트’예요. <좋아하고 있어>는 제가 오래 전부터 원하던 작업이었어요. 저도 청소년기에 비슷한 고민을 했고, 무엇보다 화해하지 못한 채 서먹서먹해진 제 과거를 ‘작업’을 통해 만난다는, 그 의미 있는 거리감이 좋았어요. 커밍아웃할 용기가 생겼죠. 저는 그 작품이 여성간의 친밀성에 대해 고민하는 여성청소년 이야기라고 했을 때, 제게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런데 한 배우가 공연 전에 프로그램북의 제 글을 매일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스태프들이 보여준 그런 노력 덕에 저도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를 배웠어요.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새 작품 ‘대성당’이 오는 21~25일까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열린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새 작품 ‘대성당’이 오는 21~25일까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열린다.

눈에 의존하지 않는 연극, <대성당>
혜진: <좋아하고 있어>의 감상평 중 ‘수도꼭지 물 떨어지는 소리’ ‘전깃불 탁 켜지는 소리’에서 등장인물의 외로움과 희망을 느꼈다는 글을 봤어요. 대사나 시각이미지가 아닌, 음향 같은 추상언어를 연극언어로 만드는 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목소: 시각이미지에 비해 청각이미지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아요. 상황에 어울리는 소리를 감각적으로 상상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도 텍스트언어를 경유하는 게 더 편해요. 대본에 “물이 똑똑 떨어진다”라고 적혀 있으면, 물의 여러 속성을 파악해서 물소리를 만듭니다. ‘여당극’의 사운드작업은 특히 힘든데, 자꾸 ‘사람이 태어나려다 만 소리’ 같은 걸 만들라고 해서….
주영: 곧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을 각색해 무대에 올려요.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공연 때 보니 미아리에 시각장애인이 운영하는 점집이 많더라고요. 시각장애인의 언어를 비롯해 다양한 전달매체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 시각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대 아닌 곳에서 그들은 차분하고 겸손했지만, 자신들이 말하려는 바가 제대로 전해질 때까지 달변이든 눌변이든 개의치 않고 거듭 메시지를 발신했다. 이 기사는 그 농밀한 대화의 30%에 불과하다. 남은 이야기를 듣길 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극장’에서 만나야만 한다. ‘눈에 의존하지 않는 연극’에 도전한다는 작품 <대성당>은 2018년 11월 21일부터 25일까지(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3시)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상연된다.

* 고주영: 독립예술제를 비롯한 공연예술축제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에서 일했고, 한국과 일본에서 공연예술기획자이자 번역가로 활동한다. <현대일본희곡집6-8>,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여기는 당연히, 극장: ‘우리가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연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작업자들의 협력체. 2012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타즈매니아 타이거>,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셰익스피어 소네트>,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 작성 가이드> 등을 공연했다.

►[‘여성-창작’을 말하다] ① 웹툰 <먹는 존재>, <족하>, <홍녀>의 작가 ‘들개이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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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창작’을 말하다] ② 소설집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의 작가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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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창작’을 말하다] ③ 영화 <소공녀>,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영화감독 전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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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창작’을 말하다] ④ 페미니스트 드랙 아티스트 ‘드랙킹 아장맨’
http://www.womennews.co.kr/news/144790

►[‘여성-창작’을 말하다] ⑤ IT업계 페미니스트 모임 ‘테크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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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창작’을 말하다] ⑥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 ‘페이머즈’
http://www.womennews.co.kr/news/180422

 

 

문화연구자 오혜진
문화연구자 오혜진

* 오혜진: 문화연구자.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그런 남자는 없다>(공저),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등의 책과 평론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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