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 속으로 ]

불온한 시선, 그리고 폭력 - 두 이주 여성의 환멸 그린 연극 '텍사스 고모' -

연극에서는 두 여성의 이미지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중년의 한국인 춘미와 19세의 키르기스스탄 여성. 나이도 국적도 다른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평범한 사랑과 이해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는 결혼을 통해 해외 이주를 했다는 점이다. 춘미는 36년 전 숨 막히는 듯한 고향 마을에서의 삶 대신 환상을 좇아 주한미군 리처드와 함께 미국 텍사스로 갔다. 키르기스스탄 처녀는 결혼알선업체의 중개로 내일모레면 환갑인 한국 남자와 이제 막 결혼해 충북 괴산에 정착하게 된다.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단 제공

작품은 이들이 해외이주와 함께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며 환멸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과거 피해자로서 온갖 설움을 받던 시절의 악몽은 까맣게 잊은 채 이제는 가해자의 나라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들춰낸다. 동시에 결혼에 의해 한국에 들어온 동남아 지역 출신의 이주민과 그들의 자녀가 숱한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지를 그려낸다.

'텍사스 고모'(윤미현 작/최용훈 연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1125일까지)는 안산문화재단의 ASAC 창작희곡 공모 대상수상작(2017)을 이 재단과 국립극단이 함께 무대화한 것이다. 국립극단이 공동제작에 나선 것은 작품의 내용이 다문화가정이 많은 안산 지역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관심사라는 점을 반영한다.

작품의 프롤로그는 36년 전 텍사스의 옥수수밭에서 힘겹게 옥수수를 꺾는 작업을 하는 춘미의 장면이다. "집에서도 비키니를 입고 수영을 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리처드의 말에 현혹되어 미국에 온 춘미는 그나마 힘든 노동으로 번 돈을 모두 그에게 빼앗긴다. 춘미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집 떠날 때 친구가 춘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며 고향 마을을 그린다.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단 제공

극의 마지막은 키르기스스탄 여성과 춘미의 장면. "한국에 가면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먼 길을 온 키르기스스탄 처녀는 땡볕 아래 밭에서 힘겹게 호미질을 하면서 고향의 음식인 라뾰시카 부스러기를 꺼내 먹는다.

극 속에는 부탄 출신 엄마를 둔 동네 어린이, 한국인 시어머니에게 국자로 머리를 얻어맞기 일쑤인 캄보디아 엄마의 아들 소철이 등장한다. 이들은 느닷없이 환갑을 앞둔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불과 세 살 더 많은 키르기스스탄인 새엄마를 갖게 된 사춘기 소녀와 동병상련(同病相憐)한다.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단 제공

이 연극이 어둡고 추악한 얘기를 전하면서도 관객의 웃음을 자극하는 것은 이런저런 어처구니없는 설정 덕이다. 사춘기 소녀는 "눈구멍이 조금 더 크고, 눈썹이 더 많은" 키르기스스탄 출신 새엄마에 완전히 빠진 아빠와 끝없이 티격태격하며 둘 사이에 애가 생기지 않도록 콘돔을 사 아빠 손에 쥐여주기도 한다. 사춘기 소녀의 고모, 즉 아빠의 여동생이 36년 전 미국으로 이주한 춘미, '텍사스 고모'라는 것은 극적인 설정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 연극은 과거 춘미의 상황과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여성을 대비시키며 추악하게 변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이려는 것 같다. 작품 안에는 지나칠 수 없는 또 다른 시선도 엿보인다. 문제의 씨앗은 오래전 부터 이미 한국 사회 속에 잉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춘기 소녀의 아빠는 과거 어린 여동생 춘미를 강제로 돈 있는 집에 보내 버리고 "나 몰라라." 했으며 결과적으로 춘미는 노동력 착취의 대상이 됐다. 그는 또 '못생긴' 아내를 쫓아낸다. 이후 스무 살도 채 안 된 키르기스스탄 여성을 꾀어 괴산에 데리고 와 '공부 약속'은 묵살한 채 밭으로 몰아낸다.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장 제공
두 이주 여성의 환멸을 담은 연극 '텍사스 고모'의 한 장면. 사진_국립극단 제공

약자에 대한 무서운 집단적 폭력의 이미지도 작품 안에 배어 있다. 캄보디아 며느리를 끝없이 못살게 한 소철 할머니는 그것도 모자라 이웃 키르기스스탄 여성의 버릇을 처음부터 고쳐놔야 한다며 폭력을 사주한다. 사춘기 소녀 아빠의 폭력이 시작되면서 모국에서 불가능했던 공부를 해 보겠다던 이주 여성이 꿈은 무너진다.

주제 자체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극중 상황의 설정으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한편 덤덤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다문화가정의 구성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한 점이 돋보였다. 등장인물이 떠나온 땅에 대한 그리움을 고향의 음식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처음과 끝의 이미지를 연결하는 수미상관(首尾相關) 방식의 장면을 구성한 것에서도 치밀함이 느껴졌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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