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박물관은 내 평생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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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가 만들어내는 수십가지의 색채미학은 이렇게 오묘하다.<사진·민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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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 성격의 41살 노총각 안치용씨가 그 평생의 꿈을 실현할 날은 언제일까. 그에게 같은 길을 걸어갈 동반자라도 나타나 준다면 그의 미래는 한층 밝을 듯하다.

‘하늘이 울고 간 자리, 땅을 웃게 하는 주인이 여기서 닥종이와 춤을 춥니다.’

아마도 그를 평소 잘 아는 사람일 게다. 불혹의 세월을 한지와 함께 해 안치용씨 그의 작업실 방명록에는 이렇듯 멋진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어려서부터 늘상 봐온 거라 한지는 제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생중계라도 하고 싶을 만큼 충청도와 강원도 말씨가 절묘하게 결합된 느릿느릿한 그의 말투가 순수하다.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업을 물려받았다는 안 씨에게 한지외 다른 일은 꿈에도 생각 못할 만큼 천직으로 다가왔다. 닥나무가 마을 주변에 널려 있는 자연환경이 그러했고, 그런 닥나무를 키우고 껍질을 벗기고, 삶고 치대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요, 자신의 일이기도 했던 탓이다.

“마을의 이장이 닥나무를 모아 오면 우리가 종이를 만들어서 동네 주민들에게 나눠줬어요.”

창호지를 썼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지 종사자들은 과거에는 천대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을에선 없어선 안될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우리 전통문화 계승자가 드문 현실에서 어지간한 소명의식 없이 이 일을 지속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는 21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공장도 짓고, 본격 작업에 착수했다.

공장이라고 해서 여느 상품을 판박듯이 찍어내는 기계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철저하게 전통의 방법으로 한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실 한지를 말릴 사람이 없어서 작업이 더뎌요.”

한지 말리는 일은 최종 공정작업.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손길을 가장 많이 타는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공장은 적막강산이다. 다들 도시를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감을 찾아 떠난 탓이다. 다만 일선에서 물러나신 아버지 안영하(67세) 옹은 여전히 그의 일손을 돕는 영원한 후원자다. 사실 아버지야말로 신풍 한지의 오늘을 일군 장본인이다. 그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종이박물관을 만들고자 한다. 그 평생의 꿈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리고자 함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실 한켠에 놓여 있는 그의 작은 방은 지금이라도 개인전을 열어도 좋을 만큼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저마다 다른 종이질을 재현, 복원하기 위해 그가 발품을 팔아 모아놓은 1448년의 낡은 서책부터 한지로 옷을 만든 이조시대 옷까지 온갖 한지 관련 작품들로 그득하다. 천년을 간다는 한지의 질긴 생명력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에겐 소박한 꿈이 하나 더 있다.

“ 저와 같은 계통에서 일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

같은 동네의 처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시를 향해 떠나간 탓이다.

김경혜 기자musou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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