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 장자를 만나 농담하다

~18-7.jpg

기술의 매직이 가져온 21세기의 가상세계는 인류의 역사가 현실과 가상세계, 혹은 현실과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 이제까지 펼쳐온 상상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열어놓았다. 이 가상세계는 이편의 ‘바깥’에 위치한 저편이 아니라 이편 ‘안’에 자리잡은 저편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모든 상이한 시간들과 공간들을 동시에 한곳에 존재케 하는 이 새로운 ‘물질적’ 가상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상상력이 저장돼 있는 파일 꾸러미를 들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이 난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고자 하는가?

영화는 ‘환(幻)’, 즉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영화 속의 몸을 영화보다 더 가상적인 게임의 세계 속에 침투시킴으로써 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에 대해 가장 가상적인 방식으로 말하려 한다. 중국집 배달부 주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게임에 접속해 들어간다. 게임에 이기려면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한다. 소녀가 추위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둬야 하고, 죽어가면서 소녀가 떠올리는 사람이 바로 그 게이머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소녀는 신의 아들을 대신해 계속해서 ‘수난극’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그러나 주는 이 게임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소녀를 따스하게 보호하려 한다. 주의 이러한 위반은 소녀가 주변 모두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버그 현상으로 확장된다. 주와 소녀는 이제 시스템이 파견한 전투병들과 일대 격전을 치뤄야 한다.

그러나 주와 소녀가 궁극적으로 격파해야 할 대상은 주를 게임으로 이끌었던, 그리고 지금 막 격전의 파고 위에서 다시 파닥이고 있는 나비이다. 이렇듯 장자의 ‘호접몽’ 서사는 영화의 숨겨진 핵인양 영화 전체에 대한 해석학적 중심 기호로 불쑥 돌출해 나온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대한 은유인 나비는 죽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나비로 매개되는 이편과 저편, 두 세계는 두 장의 유리판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려야 한다. 왜? 영화가 또 다시 불쑥 내민 해석학적 열쇠로서의 금강경 구절에 의하면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 나비와 함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죽이고 주와 소녀는 어떤 해변가에서 아이를 품에 안은 ‘성스러운 가족’의 모습으로 남겨진다. 물론 이 ‘성스러운 가족’ 역시 한편의 세속화에 지나지 않는다. 라이터의 부탄가스를 마시며 죽어 가는 소녀의 재림이 한편의 세속화인 것처럼. 우리가 매번 접속을 통해 체험하는 저 가상세계가 현실 저편에 대한 이전의 종교적 신비주의 체험의 세속화인 것처럼.

모든 형상이 결국은 가상일 뿐 형상, 즉 진상이 아님을 깨닫는 게 장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지금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만큼 더 절실하다는 것인가. 소위 지구화 시대의 문화실천답게 동서양의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에 뿌리를 둔 상징들과 앞선 영화들을 무차별로 차용하면서 이 영화가 꿈꾸었던 ‘웅장한 기획’은 그러나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라이터팔이 소녀는 신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경제 도덕적 환경에 대한 풍자가 되지 못했고 나비의 이야기나 금강경의 경구는 너무나 문맥과 무관하게 강압적인 선언문으로 새겨져 들어와 관객들의 세속적인 가상세계 체험을 깨고 구원에 대한 몽상을 부추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도가 사태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너무 비싼 값을 치르고 얻어낸 한편의 농담이다. 전지구 자본주의 문화상품 시대에 나비는 어디서 팔락이고 있을까? 혹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진담 같은 농담 속에서 팔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영옥/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