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지 10돌 맞아 되짚어 보는 민중가요 발자취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노래했던 민중가요는 이제 추억의 노래로 불리고 있는가. 꽃다지는 14, 15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리는 10주년 기념공연 ‘노동가요 15년, 꽃다지 10년’을 통해 그 말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 물음표의 해답을 찾아 민중가요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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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80년대이래 뜨거운 투쟁의 현장, 그곳에는 언제나 민중가요가 있었다. 억압받는 자의 저항에 함께 하며 소외된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 민중가요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래서 민중가요는 ‘절반의 사람’을 노래하며 여성들의 아픔에도 함께 해왔다.

그런 민중가요의 중심 줄기 중 하나인 꽃다지의 역사는 1980년대의 시대 상황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1984년의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그때까지 서울대·고대·이대 등 소수에 그쳤던 대학 노래패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캠퍼스 밖에서 새벽·노래를찾는사람들(이하 노찾사) 등의 노래단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노동자가 노래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그 동안 뚜렷한 구심점 없이 진행돼왔던 노래운동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88년 구로지역 노동현장을 거점으로 한 ‘노동자노래단(이하 노노단)’과 대학노래패 출신들로 구성된 ‘삶의노래 예울림(이하 예울림)’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가 결성되는 그 순간까지 노동자들과 함께 웃고 울었다. 바로 이들이 꽃다지의 전신이다. 노노단과 예울림의 결합으로 탄생의 기반을 갖춘 꽃다지는 1992년 2월 첫 발성을 내질렀다.

현장과 늘 함께 했던 꽃다지

그 첫 소리를 내던 시기는 노동운동이 1991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실패로 좌절을 맛보던 시기이기도 하다. 노노단과 예울림의 결합체인 꽃다지도 그 파장을 피할 수 없었다. 이은진 꽃다지 전 대표는 “전노협이 결성된 후 정권의 물리적인 탄압은 더 심해졌고 골리앗 투쟁의 실패로 그 동안 그칠 줄 모르고 내달리던 노래운동의 발걸음이 일단 정지됐다”며 “1992년 대선 후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의 분열도 노래운동을 정체기로 몰아가는 데 일조했다”고 설명했다. 1990년 이후 개인의 삶을 응시하는 서정적인 내용의 노래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민들레처럼, 희망의 노래, 골리앗의 그림자 등이 그 노래들의 대표적인 예다.

노래운동이 그 토대인 노동운동과 함께 한 풀 꺾일 때 그 좌절의 두께를 뚫고 등장한 꽃다지는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라는 노랫말처럼 운동력을 되살리는 활동을 펼쳤다. 이런 역사가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로 이어지는 꽃다지의 힘이다.

민중가요가 사전심의를 통과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던 그 시절, 꽃다지는 1992년과 93년 연이어 비합법 음반을 낸다. 억압 속에 잦아들던 노래운동의 물결은 1994년 꽃다지 최초의 합법음반이 나오면서 새로운 결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88년 노찾사 이후 민중가요로는 두 번째의 합법음반이다. 민중가요의 무대를 집회장 너머 대중 속으로 퍼져가게 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그 무렵 대중가요에서 전향해 민중음악인이 된 정태춘씨는 헌법재판소에 사전심의에 대한 위헌 소송을 냈고 1993년 사단법인화 된 민족예술인총연합은 세종문화회관에 입성하며 군부독재시절 둘러쳐졌던 장벽을 허물었다.

합법음반 발매로 더욱 활력을 얻게 된 꽃다지는 매년 30회 이상 현장공연을 할 정도로 노동운동에서 발로 뛰는 모습을 보였다. 1995년 민주노총이 건설되던 역사의 현장, 1997년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 투쟁에 모두 노래를 품고 뛰어들었다.

민중가요 변해야 산다

초기 꽃다지의 주축이었던 김영애, 조민하, 유인혁씨가 차례로 꽃다지를 떠나고 이은진씨가 대표를 맡던 1994년 무렵부터 꽃다지는 변하기 시작했다. 사회·문화적 환경변화에 맞춰 생존전략 차원에서 민중가요의 다양한 형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

새로운 음악장르의 도입과 솔로가수 배출, 공연 방식의 변화 등이 꽃다지가 시도한 움직임이다. 1993년 12월의 공연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에서 진행한 편지와 시 낭송,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형식은 꽃다지가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이후 많은 노래단체들이 이 형식을 빌어 공연을 시도하고 있다. 1996년 이은진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거리공연 역시 꽃다지가 첫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노동가요계 최초의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는 노래운동판에 솔로 가수들이 등장하는 첫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기상·윤미진씨 등이 꽃다지가 배출한 대표적인 솔로가수.

꽃다지에서 젠까지

예전처럼 대중을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이슈가 1990년대에 들어 많이 줄어들었다. 전사회적인 문제보다는 당장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민중가요의 내용·형식의 변화를 더욱 빨라지게 만들었다. 민중가요에서 금기 시 됐던 락이나 컴퓨터 음악을 도입하는 등 대중적인 포장을 하는 노력이 빠르게 전파된 것. 내용의 변화는 더욱 가파르다. ‘단결투쟁가’같은 집단적인 노래의 제작은 줄어들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처럼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주류를 형성하게 됐다.

그룹 젠(ZEN)의 등장은 이런 현실을 한층 실감나게 반영한다. 멋들어진 의상을 입고 랩을 읊조리며 춤도 추는 젠. 그들은 랩으로 전태일과 광주항쟁을 이야기한다. 이런 파격적인 변화는 민중가요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기존의 민중가요를 리메이크한 대중가요는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엠씨 스나이퍼(MC sniper)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거북이의 ‘사계’등을 놓고 ‘민중가요의 대중화다’ 혹은 ‘변질된 민중가요일 뿐이다’라는 논쟁이 치열하다. 이은진씨는 “민중가요는 그 노래가 만들어졌을 때의 치열하고 진보적인 감성을 전달할 수 있을 때 제 가치를 지닌다”며 “최근에 등장하는 리메이크된 노래가 민중가요가 지향하는 내용성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결국 노래의 상품화 전략에 충실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는 우려를 표한다. 민중가요 보급의 일선에 있는 한 관계자도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차이는 노래를 부르는 목적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거북이가 부른 사계는 팔기 위한 노래라는 점에서 민중가요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라며 “목적이 변질된 민중가요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민중가요의 활성화 측면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룹 젠의 신윤철 대표는 의견이 다르다. “민중가요가 댄스그룹에 의해 불려진다고 해서 그 현상을 70∼80년대의 감성으로 비난하는 것은 편향된 태도”라며 “노래는 듣는 이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노래에 하나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적절치 못한 자세”라고 지적했다.

매년 40여개의 노래단체에서 200여곡의 민중가요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10여년간 조용했던 노찾사는 최근 활동을 재개했다. 노동자·농민 등 소외된 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노랫말 ‘흔들려 다시 피는∼꽃다지’에서 느껴지는 민중가요의 끈질긴 잡초 근성을 가능케 하는 힘들이다.

조혜원 기자nanca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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