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장미꽃 스물두송이만 포장해 주십쇼. 아주 빨리요.”

강한성은 장미꽃을 주문하여 실죽 웃었다. 백민홍에게 꽃을 선물할

생각을 해낸 자신에 대한 자족감탓이었다. 그는 먼저 그 꽃을 통해

서 그녀를 향한 연정을 극적으로 전할 수 있을 터요, 또한 꽃선물에

대한 그녀의 반응으로 삶에 대한 그녀의 대응자세를 떠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가게 주인이 꽃다발을 만들고 있는 동안 그는 실실 웃었

다. 문득 에피소드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난 가을 국제

상품전시회 참석차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 그는 한국에서 산업

미술에 대한 강의를 마친 뒤 귀국한다는 미국 심리학자와 대화를 트

게 되었다. 그때 교수는 구매자의 취향에 대해서 그럴듯한 충고를 해

주었다.

“미스터 강. 낚시도구와 앨범이라는, 주로 남성과 여성을 겨냥하는

상품을 제조, 판매하는 과정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여성들의 취향이

남성들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입니다.”“그렇다면 교수님께

서는 여성 차별주의자신가요.”

“오우, 노우. 나는 물론 여성들을 하찮은 존재로 보며 여성의 지위

를 남성보다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오스트리아의 ‘오토

바이닝거’같은 사람의 관점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아요. 나는 다만

남성과 여성의 상대편 성(性)을 향한 기대치와 작업 수행 능력에는

차이가 있다고 볼 뿐이지요.”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발견하신 남녀간의 뚜렷한 차이점은 무엇입

니까.”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해 주는 얘기이니 심각하게 듣

진 마세요. 예를 들면 장미꽃을 선물할 경우 남성들은 대부분 한

번에 장미꽃 한 다발을 연인에게 몽땅 선물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

에서 차이가 있지요.”

“하하.”

그들은 순간 국적과 문화를 뛰어넘은 채 폭소했었다. 어쩌면 두 남

자의 의식 밑바탕에는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성들의

배려를 통해서 사랑을 확인코자하는 많은 여성들의 애정욕구 내지는

애정 결핍감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 우월감. 그는 예나 지금이나 일부

잘났다는 한국 여성들이 미국 여성들보다 한 술 더 떠서 매일 한아름

의 꽃을 선물받기를 원하는 소유지향형으로 변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꽃을 낭비라고 생각했던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어떻든 그가 한국의

일부 명??처녀들의 인품을 내리깎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

다. 그가 맞선을 보았던 열댓명 가량의 부유하고 꽤나 예쁘다는 여자

들치고 백수로 지내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장래 남편감의 재산과 사회적 위치에 무임승차해서 사는 것

을 ‘팔자 좋은 여자’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백민홍은 어떤 류의 여성일까? 그는 지난 번 그의 선의를

불편해하던 그녀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연인을 위해서

스스로 꽃을 사서 선물할 수 있는 힘있고 능력있는 여성임에 틀림없

으리라.

~10.jpg

“손님, 이 장미꽃 애인에게 선물하실 거죠? 특별히 예쁘게 만들었어

요.”

“전무님, 한 선생님께서 오늘 저녁 약속을 확인하는 전화를 주셨는

데요.”

그는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즉시 회사 옆 건물인 ○호텔 로비

로 향했다. 입맛이 썼다. 오랫만에 매력 만점의 후배와 데이트를 즐

기려는 찰라에 졸부의 딸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산통을 깬 듯한 느낌

탓이었다. 그는 약혼자로 행세하기 일쑤인 한순정과 저녁식사를 하기

로 약속한 터였다. 물론 약속을 깰 생각이 없는 것 처럼 그녀를 자

신의 연인이라고 결론짓고 싶지도 않은지라 그는 다만 자신과 백민

홍 사이에 불청객으로 끼어든 한순정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허나 문

제는 그녀의 부친이 소유한 재산마저 그가 외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호텔 일층 커피 숍으로 들어 선 그는 당황했다. 지금쯤은 초조한 안

색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백민홍이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

다. 그는 어린 숙녀에게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속은 듯한 낭패감에 고개를 저으며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 반이었다.

그 순간 여종업원이 다가왔다.

“강한성 전무님이시죠. 열두시에 백민홍씨라는 분이 전화하셨는데

요. 집안에 궂은 일이 생겨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셨다구요. 다

시 연락하시겠답니다.”

그녀가 다시 연락하겠노라는 종업원의 얘기에 일말의 기대를 걸면서

그는 커피숍을 되짚어 나왔다. 낭패감이 앞섰으나 백민홍의 집안에

몰아닥친 궂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허나 지금은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잖은가. 그는 회사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장미꽃을 들고 홀로 점심을 사 먹을 기분도 아니어서 뜨악한 느낌을

가누지 못한 채 그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 왔다.

빌어먹을! 그는 방에 들어서자 마자 꽃다발을 책상위로 내팽개칠 셈

으로 팔을 힘껏 치켜 들었다. 그러나 즉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쯧!

얼마를 투자했는데, 애꿎은 꽃다발에게 분통을 터뜨릴 일이 아니었

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든 지난 번 교정에서 만났을 때 그

에게 톡톡히 신세를 진 셈인 백민홍이 이제는 약속을 어기는 결례까

지 범했으니 그가 분명히 기선을 제압했음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주

인을 잃은 이 장미꽃다발을 한순정에게 안겨준다면 이 또한 경제적인

자원의 전용(轉用)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별로 잃을 것이 없

는 토요일의 손익계산서에 ‘OK’ 싸인을 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

는 쾌감과 아울러 기이한 가책을 이기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4.화해를 위한 헛된 몸짓들

어머니의 품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여섯살이 된 소녀는 방문

쪽으로 굴러가서는 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잔 것

일까! 소녀는 엄마의 흐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

는 두눈을 크게 뜨고 방안을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마귀할미가 먹물

을 뿌려 놓은 듯 모녀가 살고 있는 단칸 셋방 안은 깜깜하기만 했다.

소녀는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아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건만 손이 허전했기에 엄마의 젖

가슴을 찾았다. 그러나 손에 쥐어 지는 것은 차가운 냉기뿐, 행여 엄

마는 홀로 나를 두고 떠난 것일까. 소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엄마가 숨을 죽인 채 느껴 우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

다. 아이 역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이가 두돌이 되었을 때

씩씩한 군인 아저씨가 되기 위해서 아빠가 집을 떠난 뒤 엄마와 단

둘이서 살아왔던 소녀는 오늘에야 알고 엄마가 몹시도 불쌍했다. 아!

소녀는 벽을 향해 돌아 누으려다가 숨이 멎을 것 처럼 놀랬다. 엄마

아닌 다른 누군가가 소녀를 나꿔채듯 품에 쓸어 안았던 것이다. 아이

의 숨길이 막힐 만큼 아이를 쓸어 안은 남자는 가슴에서는 담배냄새

와도 같고 땀냄새와도 같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이는 토할 것만

같았기에 남자의 가슴을 때렸다.“울애기. 민홍이 울지마. 아빠야 아

빠가 왔어.”

다만 ‘아빠’라는 이름만으로 속에 살아 있던 남자가 아빠라고 얘

기했을 때 소녀는 왜 그리도 서러웠던지. 그 낯선 아저씨의 품에서

풍기던 매케하고도 비린 냄새탓이었을까. 아님 어둠 속에 얼굴을 감

춘 채 소녀를 놀래키며 깊은 밤에 ‘밤손님’처럼 모녀앞에 나타났던

낯선 사람이 그토록 그리던 아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아빠를

향한 아이의 그리움이 너무도 깊었던 걸까. 아이는 ‘아빠’라는 아

저씨의 품에 안긴 뒤에도 한 동안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전등불을 켜야 겠소. 홍이가 나 때문에 많이 놀랐나 보

오.”

“아니요. 불빛 아래서 당신을 본다한들 애는 당신을 알아 보지 못할

거예요. 민홍이는 늘 ‘울 아빠는 장군님’이라고 자랑하고 다녔죠.

아무리 말려두요.” 장군이 아닌 아빠는 단지 한숨을 내쉬면서 소

녀를 더욱 세게 품에 끌어 안았을 뿐이었다. 아이는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아빠품에 안겨 있음을 뒤늦게 안 다음에도 ‘아빠’를

부르며 아빠를 끌어안지 못했던 것은 낯선 남자에 대한 수줍음 탓이

아니라 지금껏 자랑하고 다녔던 '장군아빠'아닌 쫄병 아빠의 진

짜 모습에 대한 가슴 무너지는 실망 때문이었음을. 아이는 일부러 잠

을 청했다.“당신은 새벽에 부대로 돌아가셔야죠. 월남에 가신다니

위험하지 않을까요?”한 팔에는 아이를 다른 한 팔로는 엄마를 안고

있던 아빠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월남이란 전쟁다운 전쟁 조차도 일어 나지 않는 야릇한 전

장터라오. 게다가 나는 통역일을 담당하는 비전투원이잖소. 조금도

염려 하지 말아요.”아이는 월남을 몰랐다. 그것이 그들의 이별을

재촉하고 있음을 알았을 뿐.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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