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영화제 오프닝 영상 유감

전주영화제에 다녀왔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부터 내년 전주영화제가 간절히

기다려질 정도였으니 아무래도 나는 전주영화제에 톡톡히 반한 듯 싶다.

그러나 그 즐거운 시간 속에서도 살짝 박힌 가시처럼 나를 쿡쿡 쑤시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매회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에 돌아가던 전주영화제 오프닝 영상이 그 범인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영상의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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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문이 삐그덕 열리고 한 사람-남자가 들어온다. 검은 화면 속에서 그 하얀 실루엣만이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몸이 반으로 베어지고 다시 붙고 여하간 고생 끝에 그는 성냥불을 켠다. 주변이 화악 밝아지면서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기묘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커다란 꽃무늬처럼 혹은 만화경처럼 구성된 화면이다. 다양한 사건들의 실루엣이 장식적인 색채와 무늬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 중앙에는 한 여자가 침대 위에 나신으로 누워있다. 남성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전형적인 누드의 포즈다. 잠에서 깬 여자는 역시 알몸인 사람 -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그 비명이 끝나자마자 교태스런 몸짓으로 남자의 성냥불을 끈다. 다시 주변은 어두워지고 남자와 여자의 하얀 실루엣만 남는다. 여자가 한번 더 성냥불을 불자 스크린에는 오로지 어둠만 가득하다. 그리고 전주영화제 로고가 뜬다.…

상상보다 멋진 열락으로 인도하는 전주영화제라는 것일까. 자세한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이 곳에서도 주인공은, 주체는 남성이다. 여성은 그리고 여성의 몸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영화의 세계, 마법의 세계’를 은유하는 상징일 뿐이다. 갖은 고생을 하며 영화의 세계를 찾아가는 남자와 그곳에 전리품처럼 장식돼 있는 나신의 여자를 보며 여성관객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영화제에 임하라는 것일까.

상상해보자. 만약 칸이나 베니스 영화제에서 어둠 속을 탐험하던 백인남성이 불을 탁 켜는 순간 ‘어설픈 동양풍’의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면서 동양인들이 그를 맞이해 서비스를 베푸는 이미지가 영화제 홍보용으로 자라락 펼쳐졌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단박에 ‘구시대의 오리엔탈리즘이다. 뭐하냐,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냐’하면서 극장 한쪽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비서구권 영화인들과 언론인들은 깊은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주영화제에서는 그 기발하고 참신한 영상에 관객들이 나즈막한 웃음을 보낼 뿐이었다. 은근한 성적인 메시지라는 점에서 한 점 따고 들어간 듯 싶다. 비록 그 메시지가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일 지라도 말이다.

고백하건대 실은 나도 내심 감탄하긴 했다. 이번 전주영화제에는 고정된 젠더와 섹슈얼티에 도전하는 킬러필름즈 특별전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와 같은 영상을 채택하다니 모순을 감내하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홍문 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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