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이 실존을 대체한 시대의 초상

현실을 관찰하고 시대의 취향을 앞서 가는 데 명수인 코헨 형제가 이번에 내놓은 영화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는 동요와 불안으로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시기에 ‘걸맞게’ 조용하고 느리다. 불륜과 살인, 결혼식, 구류 등 적지 않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거의 적요함을 닮은 흑백 사진 몇 장으로 응고되는 장면들.

영화는 직업의식도 없이 종일 사각의 닫힌 방에서 타인의 ‘신체 일부인 머리카락’을 잘라내야 하는 한 남자, 스스로 근대의 거대한 자본기계에서 몸을 빼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인’이어야 하는 한 남자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그는 ‘월광소나타’의 작곡가가 베토벤이라는 것도 모르는, 근대적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근대적 성찰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혹은 근대적 자아의 내면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차원이 열린다. 갑자기 그를 강타한 어떤 ‘낯선 질문’- 이 질문의 기이함, 낯설음은 그를 존재의 수수께끼에 연결시킨다. ‘보라, 이 머리카락들을! 이것들은 계속해서 자라난다. 죽은 뒤에까지도! 그리고 우리는 이 머리카락을 잘라내 버린다. 신체의 일부를 말이다! 머리카락은 언제쯤 육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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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은 내부와 외부, 신체와 비신체, 살아있음과 죽어있음, 그리고 이 모든 것과 얽혀있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에드 크레인, 그는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답게 일체의 욕정을 자신의 신체와 심리구조에서 삭제해 버린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단 한번, 신뢰할 수 없는 떠돌이 손님의 말 한마디에 약간의 동요를 느끼고 ‘인간 극장’ 안으로 들어가고자 움직였을 때 그것은 피할 길 없는 사건들의 산사태를 몰고 온다.

그리고 그 극장 안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의 그물망에 잡히지 않는 유령적 존재, ‘단지 이발사’일 뿐이다. 그가 ‘살인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조차도 사람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호사 리덴슈나이더가 강변하듯이 그는 누군가를 살해할 만큼의 ‘크기’를 지니지 못한 그저 ‘이발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일개 이발사가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을 만큼의 분노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만큼의 지적 합리성 그리고 심리적 용기를 지닐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이발사’라는 한 기능인일 뿐 자신의 잉여적 존재 양태에 구토하고 반항하는 근대적 ‘자유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갈 때조차도 ‘계속해서 그곳에 없는 남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발사 에드 크레인의 딜레마가 있다. 기능인 이발사와 머리카락의 수수께끼에 몰두하는 ‘개인’ 에드 크레인 ‘사이’에서 고요한 흑백의 모순, 이율배반을 연출하고 있는 이 딜레마.

나는 누구인가. 그저 우연히 이곳에 있게 된 하찮은 존재 아닌가. 없어도 그만인 잉여적 존재 아닌가. 그러나 ‘나’를 휩싸고 도는 이 이상한 이물질의 느낌은 무엇인가. 사르트르의 로캉텡(<구토>)과 일정 부분 피를 함께 나누고 있는 이발사 에드 크레인은 그러나 철학가가 아니다.

주체의 ‘실존’ 안에 공존하는 ‘존재와 무’의 문제가 갑자기 그를 덮쳤을 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카락의 문제일 뿐이었다. ‘도대체 너란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라고 사람들이 다그쳐 물을 때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머리카락은 언제쯤 육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까?’라는 선문답 같은 질문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이중의 매듭으로 얽혀 있는 이 딜레마 때문에 사형 집행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이마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차분하고 냉정하다.

소위 지식인이 아닌 소시민의 ‘실존적 자아감(自我感)’을 이토록 정교하게, 흑백과 회색의 앙상블 속에서 보여주는 코헨 형제의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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