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여성주의의 불꽃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21세기 여성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가부장적 신분제약이 여성을 옭아매던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살다간 정월 나혜석이 한 말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여성의 삶이 시속의 화제거리가 되면서 당대를 압도하던 그의 뛰어난

문학, 미술작품들은 오히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그래서 예술가로서도 여성으로서도 불행의 무게가 너무 컸던 나혜석. 1918년 발표한 자전소설 <경희>는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1921년 처음으로 연 개인전에선 300원을 호가하는 값에 전 작품이 매진된다. 당시 평균월급은 20원이었다. 글과 그림에 두루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나혜석은 실로 당대 문화계를 주름잡은 기인이었다. 11회에 걸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과 수상, <매일신보> <동아일보> <개벽> <학지광> <신동아> <중앙> 등 다수의 신문과 잡지에 수필, 소설, 시 등을 발표했다.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1915년 동경 사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다. 3·1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에도 연루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20년 24살의 나이로 전부인과 사별한 김우영과 결혼했으나 1931년엔 남편 김우영과 유럽을 여행하다 만난 천도교 교령 최린과 사랑에 빠져 이혼을 당한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자신의 이혼담을 담은 ‘이혼고백장’을 발표해 다시 한번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점점 속세와 멀어져갔다. 그러나 항상 10개씩의 캔버스를 갖고 다녔고 글을 쓰며 생을 버텨나갔다. 이렇다할 안락한 집 하나 없이 그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다 1948년 12월 10일 거리에서 나혜석은 파란의 생을 마감한다.

그 나혜석의 재능과 정신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모여 1995년 유동준 회장을 중심으로 나혜석기념사업회(이하 기념회)를 만들고 해마다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 및 ‘나혜석 여성미술대전’을 열고 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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