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휘종/환경정의시민연대 정책기회팀장

원주민이란 단어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 조금은 엉뚱할지도 모르겠다. 글쓴이도 그동안 우리 사회의 원주민에 대해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 과연 원주민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곱씹어 보게 된 계기는 지난 2월에 있었던 리우+10 한국민간위원회 준비 워크숍이었다.

각 분야의 민간단체와 사회단체들이 모여 1992년 리우회의 이후 10년 동안의 지구적·지역적 차원에서 진행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노력을 평가하고 새로운 전망에 대한 논의를 준비하기 위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때 한 지역단체 활동가가 한 이야기는 원주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했다.

“한국에서 원주민은 지역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 원주민이 없다고 하는 겁니까?”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밀림속 오지 주민들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이 지배적인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원주민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이유로 어휘의 사용에 있어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부정적 뉘앙스를 피해 원거주민이라는 단어로 대치하여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의 인식수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원주민과 지역에 대한 고민은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환경부정의 사례조사를 진행하면서 그 실체에 조금은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여수공단(전 여천공단)에서 여수 토박이들이 겪고 있는 피해는 제3세계 원주민들에 대한 선진국의 착취, 공동체문화 파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주한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들이 유발한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겉으로 드러난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원주민들과 이주민(공단직원)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이 환경오염의 근저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토박이들과 달리 공단직원을 위한 사택은 오염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거기다 원주민들은 죽음의 땅,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린 고향을 빼앗기고 국가의 이주대책에 밀려나고 있는 처지다. 그 사이 대대로 지켜오던 전통문화와 공동체는 얄팍한 공단측의 보상금을 통한 회유에 상처받은 지 오래였다.

또한 여수공단내 사건, 사고로 인한 피해자의 대부분이 보수기간 중 일용직으로 채용된 지역의 협력업체나 주변의 주민들이다. 이 사실은 원주민들에 대한 공단측의 태도가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지역공동체 파괴는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중앙의 지역에 대한 인적·물적 착취, 공동체문화의 파괴가 당연시되는 우리의 풍토에서 중앙과 지역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환경정의 운동의 시작이 될 것이다.

올해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시대를 연 리우회의 10주년이다. 세계정상들이 리우에서 합의한 의제21에 의하면 지속가능한 개발의 선결요건 중 하나는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지역·연령·세대·계급·성을 떠난 공공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의 희망은 바로 차별을 철폐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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