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환경운동을 주민자치운동으로

군포시 광정동 조금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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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역에서 10여분 정도 달리니 외국영화에서나 봤음직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 인근에 이런 동네가 다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조금숙씨(사진 맨 뒤)는 이렇게 쾌적하고 깔끔한 동네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환경운동가’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우리 집에서 차 한잔 나누세요.”

1993년 산본 신도시로 이사한 후 며칠 안돼 그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이렇게 써붙여 놓았다. 14층 새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벼운 목례조차 나누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닌데’ 싶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 39명의 ‘이웃사촌’이 찾아왔고 이 만남이 인연이 돼 그는 군포소각장 범시민 대책위원회에 ‘주민대표’로 참여하게 된다.

소각장 문제를 계기로 97년 출범한 군포환경자치시민회와 쓰레기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참여하면서 주민운동과 생활환경운동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그는 ‘반대’보다는 ‘대안’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98년 3월부터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쓰레기 분리수거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바구니 사용하기,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운동을 실시했고 지난해 11월부터는 ‘쓰레기 배출 실명제’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지키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죠. 우리 아파트 부녀회는 기금을 알뜰하게 운용해서 연말에 주민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는데 쓰레기종량제 봉투에 동 호수를 써서 나눠줬어요.”

지역 케이블방송 전파까지 탄 이 실명제 운동은 현재 주민 참여율 70~80%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쓰레기 때문에 이웃간에 얼굴 붉히던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얼마든지 주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단적인 예를 광정동 을지아파트 부녀회가 보여준 것이다. 군포시가 전국에서 쓰레기가 가장 적은 쾌적한 도시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렇듯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각장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제 이름은 조금숙이 아니고 소각장입니다”하고 대답한다는 그는 현재 소각장 주민지원협의체 총무이자 광정동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지역을 지키는 사람이 누구죠? 바로 주부들입니다. 주부들이 주도하고 있는 생활환경운동이 성공하려면 궁극적으로 주민자치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야 해요. 저는 이번 지방선거가 안보이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알리는 적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민운동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죠.”

지역사회 구석구석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시민단체들과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주부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지방의회에 진출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 조금숙씨는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생활철학을 군포시의회에서 활짝 펼쳐 보이고 싶다고 말한다.

신민경 기자 minks02@womennews.co.kr

가난한 이들과 함께 만드는 ‘살기좋은 마을’

관악구 신림10동 최윤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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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택한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일명 ‘난곡’으로 불리는 신림7동에서의 10년은 힘겨웠지만 역동적으로 살았던 시간이었다. 1년6개월 전 난곡재개발이 결정되면서 신림7동 818세대가 산등성이를 넘어 신림10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1997년 난곡주민회관 간사를 맡은 최윤정씨(사진 왼쪽에서 두번째)는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달동네 이야기’를 피시통신 하이텔에 올려 연재를 시작했다. 우유 사먹일 돈이 떨어진 엄마를 위해, 기름값이 없어 추위에 떨어야 하는 이웃을 위해 그는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피시통신 회원들을 중심으로 ‘달동네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후원모임이 꾸려져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우리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IMF는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어서 아이들은 밥 굶는 일이 예사였다. 99년 4월부터 실업극복국민운동 지원금을 받아 매일 100여 명의 아이들에게 ‘사랑의 도시락’을 싸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6개월여가 지나자 기금이 고갈되고 말았다.

“그때 우연히 한 방송사 특집프로그램에서 결식아동 돕는 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소개됐는데 방송이 나간 후 전국에서 후원금을 보내고 싶다는 연락이 쇄도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특히 놀랐던 것은 구청과 동사무소에서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한 점이예요.” 그는 쌀을 마련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지방자치단체가 의지만 있으면 주민들한테 충분한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됐다.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우리 구의 예산편성은 어떻게 되는지, 사회복지는 어떤 것이 마련돼 있는지, 구정 전반에 걸쳐 제가 이제껏 해왔던 일을 접목시킬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어요.” 오랜 시간 망설인 끝에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두달 전에 2년 넘게 운영해오던 김치공장을 폐업했다. 2000년 4월 피시통신 하이텔 가톨릭동호회의 도움을 받아 ‘난초골공동체’라는 작은 김치공장을 창업할 당시만 해도 그의 꿈은 소박했다.

“빈민 여성들은 4중고에 시달려요.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교육문제, 살림살이는 기본이고 생계도 책임져야 하거든요. 여자들이 악착같이 살고 있는 곳이죠. 그러나 대접받지 못하고 살고 있어요. 그 아줌마들이 김치공장에서 돈도 벌고 지역에 대한 애정도 갖고 가정도 지키길 바랬거든요.”

돈 버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라며 사람좋은 웃음을 짓던 그는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평생 이루고 싶은 꿈인 ‘가난한 사람도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를 이제 신림10동에서 이뤄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91년 신혼여행길에 광주 망월동을 찾아 ‘살아남은 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과제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한 다짐을 ‘죽는 날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겠다’는 평생의 약속으로 지키고 있는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신민경 기자 minks02@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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