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의 여자/남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랑만큼 정치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인간사도 없다. 상대에 대한 매력은 상대가 ‘가진 것’에 비례한다. 외모, 경제력, 나이, 지적 능력, 세련된 취향, 좋은 성격, 성별에 따른 기대감 등. 소위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한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다른 성격의 자원일 뿐이다. 다소곳하고 힘이 없는 캐릭터가 여성일 경우 그것은 오히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 즉 여성이 가진 ‘권력’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생일대의 실연을 경험한 이후 사실 성별(젠더)에 의한 차별보다도 나이에 의한 차별을 더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게 됐다.‘심지어’ 나는 요즘 원조교제 커플에서 나이 어린 여성보다 나이 많은 남성에게 나를 더 동일시한다. 원조교제가 실상은 성매매지만, 어떤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 혹은 동성간이라 할지라도 사랑 중인 모든 인간이 가진 각자의 사회적 지위와 자원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매매적 성격에서 자유로운 연애는 없다. 성매매와 ‘순수한’ 사랑은 가늠하기 힘든 연속선일 뿐이다. 어쨌거나 많은 경우 나이가 성별과 돈보다 더 큰 위력을 갖는다.

@22-2.jpg

성별은 하나의 사회적 모순으로서 계급, 나이, 인종, 민족, 장애, 이성애 제도 등 다른 사회문제와 교직(交織)돼 복잡한 현실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나이 모순과 성별이 맺고 있는 관계는 더욱 각별하다. 사실 여성에게는 나이가 곧 성별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은 한 살부터(사진관에 전시된 사내아이의 돌맞이 기념 나체를 보라!) 죽을 때까지 남자로 살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인생에서 여자(female)가 여성(woman)일 수 있는 나이는 기껏해야 10여년(15~25살)이다. 그 다음부터 여성은 제3의 성 ‘아줌마’로 살아가야 한다. 여성은 나이가 어릴 때만 여성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그런 여성만 여성으로서 가치를 매긴다. 서른 중반을 넘긴 여성에게 연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뿐 아니라 길거리 사람들조차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는다.

70세의 숀 코넬리와 30세의 캐더린 제타 존스가 커플로 나오는 영화 <엔트랩먼트>는 로맨스영화지만 만일 여성이 70세고 남성이 30세라면 잘 봐줘야 컬트영화고 아마도 ‘엽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나는 올해 서른다섯인데 서태지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후배에게 “언니, 그런 걸 엽기라고 하는 거야. 아마 서태지가 도망갈 걸”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었다.

며칠 전 8살 연하 남성과 사귀고 있는 친구가 찾아와 내게 눈물을 쏟았다. 그 친구는 평범한 ‘노처녀’고 상대남은 소위 능력 있고 자상한데다가‘꽃미남’이기까지 하다. 내가 볼 땐 상대가 분명 내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연애도 남자가 쫓아다녀서 시작된 것인데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친구에게 특히 상처가 된 것은 주변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조차 ‘어차피 안될 사랑’이라며 내 친구를 말리더라는 것이다(“상처받기 전에 헤어져”).

여성이 가진 것이 별로 없고 특히 나이에서 ‘밀리기 때문에’ 남자가 그녀를 좋아할 리 없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내 친구가 싫다는 남자를 ‘스토킹’한다고까지 생각한다는 것이다(아, 사람들 생각의 이 끔찍함이여. 이런데도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물론 남자의 나이가 많은 경우는 너무도 흔해서(따라서 당연해서) 아예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계급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있어도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힘든 것 같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무엇이 더 권력으로 작용한단 말인가?

정희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정폭력과 여성인권> 저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