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식 팝콘>

9일간 펼쳐진 제4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관객들의 열띤 반응을 얻어낸 영화들 중 하나는 인도계 미국인 니샤 가나트라가 연출한 <인도식 팝콘>이었다. ‘레즈비언의 아기 낳기’라는,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인도식 팝콘>이 서울여성영화제 관객들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논쟁적인 페미니즘적 이슈들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규칙 속에서 쉽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좀 더 자유로운, 다양한 쾌락과 취향을 존중하는 가족 형태에 대한 여성관객들의 ‘준비된 욕구’가 영화를 만나 봇물 터지듯 환호와 해방의 웃음을 터뜨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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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달콤쌉싸름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경쾌하게 ‘통통 튀는’ 뉴욕 레즈비언 하위문화 간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두 문화간의 충돌과 갈등은 문신 아티스트이자 사진가인 인도 레즈비언 리나에 의해 매개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신비한 종교 의식으로 일상 속에 인도식 리듬과 의미, 그리고 가치를 부여하곤 하는 어머니와 뉴욕 레즈비언 그룹의 보헤미안적 생활 양식 사이를 속도감 있게 오토바이를 타고 움직인다.

아이를 원하되 낳지 못하는 언니를 위해 리나가 대리모를 자청하고 나설 때부터 영화는 상이한 입장들 사이를 오고가며 흥미진진한 토론의 장이 된다. 이제 임신한 리나의 몸에는 아름답고 장식적인 인도식 문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임신을 승인하는, 그리고 승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동그란 눈들이 각양각색의 물음표로 새겨진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아시아의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레즈비언의 가족 구성이 상호 충돌하고, ‘부모되기’의 실천을 둘러싼 레즈비언 공동체 내의 갈등이 만만치 않아지는 상황에서 긍정적이고 대단히 유머러스한 해법을 찾아 나선다.

근대국가의 출현 이래로 이성애 중심의 가족형태는 로맨틱 러브와 함께 가부장제 사회의 심리적, 경제적 기본토대를 이루는 기초단위로 간주되었고 그에 걸맞게 때론 현란한, 때론 외설스런 언어와 표현양식으로 찬양되어 왔다. 가족‘에서의’ 일탈은 언제나 가족‘에로의’ 귀환을 전제하는 것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귀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여성들의 집/가족 떠나기는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밖에 있는 미친 짓거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 얽혀있고, 자본과 노동 그리고 이미지가 순식간에 국가 간의 경계를 지워버리며 공간 이동을 하는 글로벌 시대에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이유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간/공간 감각으로 ‘누구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렇게 탄생 중에 있는, 혹은 이미 실재하고 있는 수많은 다른 동거 양태들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 어떻게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인도식 팝콘>은 가족과 모성에 대한 기존의 모델과 개념이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는 상이한 집단들의 공동거주 양태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관점 및 주장을 수용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지혜롭게 묻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건 그것의 언어화를 위해 종교적 제의가 필요한 리나의 어머니는 유쾌하고 꾀많은 의식을 집전한다. 리나의 레즈비언 파트너인 리사를 ‘아이의 아버지 자리’에 그리고 리나의 언니를 ‘임신한 동생을 지켜주는 오빠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젠더를 전도시키고, 더 나아가 자신이 숭배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형식들을 지켜나간다. 영화는 이처럼 아버지, 엄마, 딸, 아들 등의 가족 구성원, 혹은 친족 구성원이란 결국 일정한 체계 내에서의 ‘자리’, 즉 ‘위치’에 지나지 않음을 재치있게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전통적 형식들과의 협상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또한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옥/ 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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