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층의 맏딸로 가족의 생활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여자. 그녀의 책임감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점점 더 무거워만 가는데… 마침내 동생의 학비조달을 위해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주의 정부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낡은 세계의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결혼제도와 처녀성의 가치는 그녀가 속한 세계 뿐 아니라 그녀의 가족 내부에도 살아있다. 가정과 세계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그녀(맏딸)의 비극과 이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사는 한 가족의 삶이…’

이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서 있었던 것일까. 우리의 70년대 산업화 그늘에 가려진 채, 이른바 ‘쪽방’에서 가족을 위해 저임금에 시달리던 우리 언니의 이야기? 아니면 새로운 세기를 사는 오늘도 촌에서는 먹고살 일이 없어 돈 벌러 도회지로 간 누나 이야기? 꼭 우리 언니들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는 사실 우리 언니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리랑카의 누이와 언니의 이야기다. <맏딸>은 올 들어 4회째를 맞이하는 여성영화제가 처음 돛을 올리던 해 나왔던 영화. 왜 나는 아줌만데 여태 이런 영화제가 있었는지, 어떤 내용의 영화를 담고 있는지 몰랐을까. 여느 다른 국제영화제 같으면 온 나라가 시끌벅적 소란스러웠을 텐데 왜 우린 몰랐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그래도 ‘남자 대 여자’의 구도에서 좀 유보되어있다(그러나 여전히 여자로 길러지는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학교를 나오면서부터 서서히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하는 ‘남자 대 여자’ 구도는 결혼을 하면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자로서의 삶은 결국 결혼생활 속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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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해서 맞이하는 다양한 삶의 층위와 개인적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통합 정리될 수 있는 모습은 바로 ‘남자 대 여자’이다. 결혼생활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여자 되기’를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아줌마들은 개개인의 삶에서 다가오는 문제들을 모두 자기 혼자만의 문제로 혼자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여기서 겪고 있는 일과 똑 같은 일을 지구 저편에 사는 어떤 여자도 겪고 있다면, 더 나아가 이 지구상에서 ‘여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나(여성) 혼자만 겪는 ‘나의 문제’였던 것이 더 이상 나만의 문제가 아닐 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구린 것의 정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남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여자들)의 삶의 조건을 역지사지도 해보고 마음을 나누다보면 우리 삶의 모습에 한층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으리라.

스리랑카의 영화 <맏딸>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언니, 혹은 누나’에 대해 이야기-수다라고 해도 좋다!-할 수 있다. 올해 열리는 제4회 여성 영화제에는 어떤 이야기 거리들이 준비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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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거리 하나

여자의 성과 몸과 또 다른 사랑에 관하여

소녀 시절 가슴이 너무 커서 혹은 너무 작아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큰 가슴 때문에 고민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영화 ‘부비 걸’)와 욕정과 세차 그리고 케이크로 이루어진 어두운 휴식에 관한 이야기(영화 ‘어떤 요리’), 그리고 “여성 감독들이 사랑, 욕망, 특히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영화화하는가?”라고 물으며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를 통해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런가하면 왜 꼭 이성이어야 더 행복하지? 하고 묻는 영화들도 있다(‘축복’ ‘The Box’). 결혼 전에는 ‘몰라야 할 것’이고 결혼하고 나서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것’인 여자의 몸과 성, 그 억압된 욕망과 혼란(‘야행’)에 대해서라면 밤을 새도 끝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여기에 더해지는 또 다른 사랑 이야기는 이성애를 통해서만 표현되는 성의 한계를 넘는 동성애.

수다거리 둘

또하나의 가족 - 여러모양의 가족

‘가족’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 한둘이 필수다. 이 중 한 가지만 빠져도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고 남의 입에 오르내려도 된다(이건 정말 폭력이다!). 깨진 혼인에 대한 사회적 법적 형벌은 가혹하기만 하다.

여기 두 여자가 함께 사는 이야기가 있다. 이혼 경력이 있는 두 여자가 그 전 결혼에서 얻은 아들을 기르며 살아간다. 그들은 다문화 속의 미국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부부로 남고자 노력한다(‘또 하나의 가족’). 대안적인 가족의 한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수다거리 셋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금녀구역으로 인식되는 분야에서 우뚝 선 여성들이 편견과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겪는 또 다른 고통(‘아름다운 생존’)은 일하는 여자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말없이 종용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 남성사회의 한 축소판인 소방대 안에서 여성으로 능력을 평가받고 개발해 나가는 모습은 아름답다(‘화염 속의 여걸들’).

수다거리 넷

편견과 인습, 깨지고 사라져야 할것들

제4회 여성영화제 개막작인 <제비꽃 향기: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성차별의 문제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인종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결혼 후 대조적으로 변모한 두 여자동창생들을 통해 남성중심 사회가 여자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준다(‘두 여인’). 또한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는 북부 아프리카 튀니지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3대에 걸친 여인들의 삶을 정교하게 엮어 놓음으로써 온갖 억압적인 전통과 제약으로 가득찬 일상 속에서 튀니지 여성들이 어떻게 순응하고 저항하며 지속과 변화를 거듭해 나가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남자들이 오는 계절’).

수다거리 다섯

결혼은 정녕 여성들의 영원한 굴레인가?

어느 날 사라져버린 아내를 찾아다니면서 한 인간으로서의 아내를 깨달아가는 남편. 정작 아내는 가족이 사는 바로 위층의 한 여성의 보살핌 속에서 비로소 어머니/아내라는 위치에서 놓여나 자신을 털어놓는다(‘따뜻한 인정’). 한편 마약에 빠진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전형적인 ‘여성’의 삶을 깨고 나서는 여인 아남, 그 남편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아니, 그녀의 직장동료와 바람을 피우는 일을 한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다른 여성들과의 끈끈한 관계 속에서 힘과 긍지를 발견해 나간다(‘아남’). 언제나 문제해결이나 뒤치다꺼리 등 결혼의 책임은 여자의 것이기만 한가?

남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논의’ 혹은 ‘회의’가 되는데, 여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바로 ‘수다’가 된다. 흠흠... 여기에도 모종의 정치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건가. 옛날 시어머니들 중에서 며느리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는데, 이유인 즉, 혹시 며느리들끼리 모여서 자기(시어머니) 흉보지 않을까 염려해서라는 것. 그렇다면 여자들끼리 모여서 남자들 흉이라도 볼까봐, 남자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해코지라도 할까봐 두려운 걸까. 남자들이 주로 이야기하는(여자를 안 붙여주는) 내용들은 결국 힘에 관한 것이고, 항상 여자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한다. 모든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여자들끼리도 나름의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기 시작했고, 그 장은 세계 도처에서 열리고 있다.

‘여자로 길러졌고, 길러지고 있는’ 많은 딸들은 여기 <서울 여성 영화제>를 통해서 더 폭넓은 수다를 떨 수 있으리라. 굳이 모 여성학자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쯤은 안다. 공감과 연대... 그리고 자신의 삶의 조건들에 대해 좀 더 깊게 깨달을 수 있다. 여성들이여, 우리도 글로벌하게 수다 좀 떨어 보자고요!

양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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