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자 그리고 구로공단

“70년대 우리 자리를 이제는 조선족 여성들이 메우고 있는거지. 누구도 안하려고 하는 험한 일, 궂은 일 도맡아 하면서 사람 대접도 못받고. 말이 좋아 첨단산업단지지 여전히 5평도 안되는 손바닥만한 쪽방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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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만에 구로공단 ‘쪽방’이 밀집한 지역을 다시 찾은 김연자씨는 ‘조선족의 거리’로 변한 풍경이 다소 낯설었지만, 형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사진·민원기 기자>

구로공단 일대 ‘쪽방’이라고 불리는 단칸방이 밀집한, 얼마 전부터 ‘조선족 거리’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곳을 20여 년만에 다시 찾은 김연자씨는 옛날 자신이 살았던 골목골목을 돌아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천안에서 30리 떨어진 시골에서 살았던 김씨는 중학교 졸업 후 농번기 때는 집안 일 도우면서 조그만 가발공장에서 한 2년 일하다가 그 인연으로 열 아홉 살에 서울로 올라와 공단에 위치한 가발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공단 주변 쪽방에서 13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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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이 밀집한 구로공단 일대에는 조선족 동포들이 거주자의 90%이상을 차지한다

지금은 여기저기 중국어로 쓰인 간판이 말해주듯 ‘조선족 거리’로 변한 구로동, 가리봉동 일대가 김씨는 “생각보다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1970년대 단층이었던 집들이 2층, 3층으로 올라가기는 했어도 여전히 연탄을 때며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고 있는 곳이 많았다.

“여공들 자리, 이제는 조선족이 메우고 있지”

“지금은 그래도 80년대에 개조해서 많이 나아졌지. 둘이 누우면 꽉 차는 단칸방에 부엌이라고 시늉만 냈지 수도가 있나 뭐가 있나. 한집에 40개 넘는 방이 있고 사는 사람만도 100명 가까이 되는데 화장실은 달랑 하나에 수도도 공동으로 썼지. 아침이면 세숫물 받으랴, 화장실 줄 서랴, 그야말로 전쟁이었지. 화장실이 급해 달려가면 줄은 왜 그리 길었는지. 간혹 내 또래의 총각이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린 나이에 어찌나 창피하던지... 어쩔 때는 다락방에 세들어 살기도 했는데 올라갈 때도 기어서, 들어가서도 기어서, 나올 때도 기어서 내려와야 했지.”

1972년 서울통상에 취직했을 때 김씨가 처음 손에 받아쥔 월급은 8000원. 방세를 아끼려고 잘 알지도 못하는 공장동료와 함께 살았지만 월세 7000원의 절반인 3500원을 제하고 나면 집에 부칠 돈이 거의 없었다.

“가발공장이 기계화된 건 나중 일이고 나 때만 해도 손으로 일일이 만들었어. 그런데 일이 고된 건 그만두고 남자 주임이 하도 때리는 통에 무서워서 더 있을 수가 없었어. 말대답이라도 하면 발로 차고, 잔업 빼달라면 따귀 때리고. 여기 아니면 일할 데 없냐 오기가 나더라구. 그래서 옮긴 곳이 남영나일론이라고, 지금 비비안이라는 회사였어. 거기서 한 11년 일했지.”

남영나일론에서는 브래지어나 팬티, 슬립 등 여자 속옷을 만드는 ‘시다’로 일을 시작했다.

“시다가 뭔지 알아? 미싱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일이야. 브래지어에 들어가는 캡 있지? 하루에 보통 브래지어는 1천500개 만드는데 캡은 양쪽에 들어가니까 3천개를 미싱으로 박을 수 있게 동그랗게 잘라야돼. 캡이 좀 두껍잖아. 하루 종일 가위질하는거지. 미싱사가 점심 먹고 일 시작할 수 있게 해야 하니까 우리 시다들은 씹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쓸어넣고 바로 가위질 시작하는 거야. 2년 동안 그렇게 지겹도록 가위질했지. 지금도 여기 오른손 마디마디에 박힌 굳은살 보이지? 소화불량은 말할 것도 없고 어깨가 결려서 밤마다 끙끙 앓는 거야.

재봉일은 뭐 편한가. 시다 간판을 떼고 재봉일 맨 처음이 ‘본봉’이라고 그냥 직선으로 박는 일을 해. 그리고 좀 지나면 ‘지그재그’로 올라가. 브래지어 밑단에 보면 새발뜨기 한 것처럼 지그재그로 박아진 게 그거야. 그 다음이 바늘 두 개짜리 미싱으로 하는 ‘이본침’이야. 나중에 미싱사가 돼야 바이어스 대고 둥그렇게 캡을 박고 하는거지. 손으로는 계속 미싱질하면서 발로는 패달을 밟아줘야 하잖아. 하루 온종일 몸이 떨리는 상태에서 일을 하는데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거지.”

아침 8시에 출근해 30분간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어’ 같은 노래를 하고 일을 시작해서 12시나 돼야 일이 끝난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된다. 그러던 김씨는 영등포선교교회 야학에 다니면서 서서히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그때는 사는 게 뭔지, 행복이 뭔지 생각도 못했어. 하루하루가 고단하니까 내일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 그러다 야학에 갔더니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노동자의 권리도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얘기를 하는거야. 그리고 이런 처지를 개선하려면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정말로 이런 세상이 있구나, 우리는 그동안 까막눈으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 한마디 한마디가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는데 머리가 확 깨이는 느낌이었어.”

맨살에 유인물 두르고 시작한 노동운동

그렇게 서서히 의식화된 김씨는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을 시작했다. 회사내에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당시 대개 회사가 그랬듯 어용노조였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지만 김씨를 비롯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토론하고 길을 모색했다.

“점점 회사와 갈등이 깊어졌어. 우리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기로 했지. 그런데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출퇴근할 때 온몸을 검사하거든. 여러 명이 나누어 맨살에 유인물을 두르고 속옷을 입은 다음 끈으로 묶는거야. 검문하는 사람 출근 전에 회사에 나가 몰래 화장실 같은 곳에 두고 나오기를 반복했는데 붙잡히면 어쩌나 하도 진땀을 흘려 유인물이 축축해. 그리고 잔업을 거부하고 태업에 들어갔어. 잔업을 거부하는게 말이 쉽지 서로 눈치만 보면서 일어나지를 못해. 큰언니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미싱 스위치를 끄는거야. 스위치 끌 때 ‘딱’ 소리가 나거든. ‘딱, 딱’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기 시작하면 성공인 거야.”

밤에는 노조 사무실에 모여 밤샘농성을 벌였다. 전기도 물도 끊어버리지만 신문지 깔고 한달간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드디어 총파업을 결의한 76년 봄. 오전 9시까지 회사에 모여 다른 노동자들이 출근하는 것을 막기로 했다. 그때 김씨는 잠시 독산동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차가 밀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노조 조합원들로 구성된 구사대에 의해 시위대가 엄청 깨진 상태였다. 위급한 상황에 일단 흩어진 후 여의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김씨가 다른 동료들과 여의도에 도착했을 때 시위를 주동했던 사람들은 이미 연행된 후였다. 김씨 대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끌려갔다는 얘기도 거기서 들었다. 연행된 동료 10여 명은 20일간 구류를 살았다. 여성노동자들이 구류를 살기는 처음인 일이었다. 김씨에게는 그때 그 일이 지금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있다.

“사실 그때 나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든가 하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나 뿐아니라 대부분의 여공들이 그랬어.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도 같아. 맨 앞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던 그 사람들이 볼 때 나 같은 사람은 좀 비겁해 보였겠지만 우리는 먹고사는 게 최우선이었어. 노동운동도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절박한 거였어.”

그렇게 민주노조를 세워보겠다던 꿈은 꺾였고 80년대를 맞았다. 동료에 대한 미안함, 갈수록 열악해지는 노동조건 속에서 김씨는 돌파구로 결혼을 선택했다. 중매로 만난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그때 나이 스물 여덟. 결혼퇴직은 입사할 때 약속한 조건이었다. 11년간 일했지만 퇴직금은 80만원이 전부였다.

아직도 3D 업종 전전하는 그때 그 여공들

그리고 김씨는 구로공단을 떴다. 그때 자신들을 탄압하던 노조 위원장이 현재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고 있고, 자신들이 그토록 도움을 청했건만 끝내 외면했던 활동가 역시 장관까지 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김씨는 희망을 잃지 않는단다.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결혼 후 한 10년 쉬다가 성동구에 있는 인력소개소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옛날에 나처럼 공장에 다녔던 나이 50이 넘은 아줌마들이 아직도 봉제공장이나 납땜일을 찾아 오는거야. 결국 그때 여공들은 아직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우리 사회 최하층으로 살고 있는거지.”

작년부터 김씨는 구로동에 위치한 갈릴리 교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상담 일을 시작했다. 처음 목사님으로부터 이 일을 제의받았을 때는 영어도 할 줄 모르고 해서 고사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득에 용기를 냈다.

구로공단 일대를 둘러본 김씨는 근처에 있는 조선족 교회로 향했다. 정부의 불법체류자 방지대책과 관련해 이주노동자들이 시위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난 송명희 전도사와 김씨는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다른 이주노동자들보다 조선족은 좀 낫지 않아요? 말도 통하고.”(김연자)

“무슨 소리야. 중국 동포들은 다른 이주노동자들보다 들어올 때 돈을 더 많이 내요. 보통 천만원씩 빚을 지고 들어오는데 2년 넘게 꼬박 벌어야 갚을 수 있어. 임금체불은 또 어떻고. 악덕 고용주들이 밀린 임금을 주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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