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일을 하겠죠. 주변에서는 제가 그냥 생각을 지워버리면 모두 다 편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제가 떠난 자리에서 똑같은 상황이 계속 벌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가해 남성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겠죠. 일상화된 여성비하의식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피해 여성들이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사회가 바뀌지 않겠어요? 이번 일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고 힘들지만 저의 인권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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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시청 홍보담당관실 홍보협력팀에서 서울시 영문 홈페이지를 담당한 전민성씨.

계약직 공무원이었던 그는 지난 1월 17일자로 채용계약 기간 만료 통보를 받은 상태이다.

첫날부터 들어야 했던 남자직원의 반말

현재 홍보담당관실 계약직 공무원 23명 중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재계약이 된 상태라고 전하는 전씨는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게 되어 있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약 연장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인사는 불합리한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재계약이 불가능한 D급 판정을 받은 전씨는 계약기간 만료 통보를 받기 하루 전날 담당 과장에게서 “더이상 재계약을 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자신이 정한 네 가지 평가기준 중 두 번째 사항인 자료등록, 보강, 갱신이 목표량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씨는 “자신과 미리 업무성과 목표치를 합의한 적이 없는데 무엇에 근거해 그 실적 목표량이 정해졌는지 모르겠다”며 “나는 재계약된 다른 직원들은 쓰지 않았던 업무일지까지 써서 제출했는데 더더욱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해고 사유에 대한 자료를 찾던 전씨는 서울시가 ‘채용기관의 장이 해당자와 성과목표를 협의 후 각각 1부씩 보관’하기로 되어 있는 지방계약직공무원채용계약서의 업무처리지침을 위반했다며 이는 명백히 부당해고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전씨의 상사인 ㅈ과장은 “업무 협의 과정은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협의된 내용을 전씨가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안에 대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부하직원에게 함부로 하겠냐”며 “업무 내용을 갖고 재계약 여부를 평가했을 뿐 업무 외적인 일이 이번 인사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전씨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경험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남자 동료의 반말, 사무실 내에서의 흡연자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 술자리에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 행동 등에 대해 정식사과를 요청한 이후부터 집단 따돌림과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했지요.”

“회사 내에서 일어난 불쾌한 일을 참지 못한” 전씨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씨가 처음에 문제제기를 한 사안은 사무실 내 흡연 문제였다.

“공공기관은 금연구역으로 알고 있는데 사무실 내에서 상사 두 분이 흡연을 하기에 금연을 부탁했지만 묵살 당했습니다. 임신한 여직원이 출산휴가 들어가기 전까지 만이라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씨는 담배 냄새가 날 때마다 창문을 열었고 그 때마다 추운 날씨에 문까지 열어놓는다며 주위 동료들에게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성적 모멸감 정말 참기 힘들어

그러나 전씨가 결정적으로 상사들의 눈밖에 난 이유는 성희롱 사건 때문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대화 도중 여중위 성희롱 사건이 화제에 올랐어요. ㅈ비서관이 자신이 아는 사람도 불미스러운 일로 사표를 썼다고 얘기하며 옆자리에 있는 남자 주임의 가슴을 만지면서 “이런 식으로 했겠지”라며 그 상황을 재현했지요.”

전씨는 이 자리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상대가 남자이고 상사일 경우 그런 성적인 행동은 상대 여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싶었으나 그 상사의 직책상 회사 내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그냥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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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예방교육을 받으면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작년 6월 여성부에 여성차별 및 성희롱 피해사실을 진정했다.

“첫 대면부터 옆자리의 남자직원이 반말을 썼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업무상 반말을 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지만 그 이후 두 달 동안 그 분은 저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울시청공무원직장협의회에 성희롱과 언어폭력에 대해 해당 상사의 사과를 요구했다.

전씨가 당시 회식 자리에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ㅈ비서관은 해명서를 통해 “직장내 성희롱에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만큼 항상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는 차원의 얘기가 오갔고 이 과정에서 남자 주임의 가슴을 만졌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밝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랫동안 업무를 맡아온 해당 남자직원을 격려하는 뜻에서 어깨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흡연과 관련해 사과를 요청받은 한 공무원은 “집무실이 일반 직원들의 자리와 구획되어 있고 거리도 있어 그동안 손님접대, 업무 스트레스 등의 경우 흡연을 해온 바 있다”고 인정하면서 “사무실 내 흡연을 점차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고 근무시간 중 손님접대 같은 불가피한 경우 이외에는 자제하고 있다. 향후 더 자제할 것을 약속한다”고 해명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가해 남성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겠죠

피해 여성들이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일상화된 여성비하의식 뿌리뽑혀

해명서를 보내온 해당 공무원은 5명. 이들은 대부분 전씨의 주장이 “당시 상황을 날조한 것이고, 일방적인 언어폭력 사실은 없었으며, 전씨의 언어폭력에 대한 정당한 방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전씨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법적 대응을 비롯한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종교에라도 의지하고 싶어 스카프 둘러

전씨는 작년 10월부터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다닌다.

미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무슬림인 말레이시아 친구가 생각났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음을 의지하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를 생각하며 스카프를 쓰게 되었다. 무엇보다 너무 힘들어 종교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무슬림과 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외부에는 아프간 침공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스카프를 쓰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집단 따돌림 등 회사에서 하루도 버텨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많은 의지가 되고 있다.”

그는 스카프를 쓰고 다닌 이후 더욱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스카프를 쓰고 다니는 것은 엄연히 개인의 선택으로 사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는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한 것이다.

전씨는 자신의 얘기를 그나마 잘 들어주던 시청 출입 기자도 자신을 피하는 눈치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도와주던 동생이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가장 힘든 점이었다고.

아무도 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참으라고 하거나 그 정도 경력이면 그냥 다른 곳에 취직해 맘 편히 일하라는 충고도 그를 힘들게 한다.

전씨가 요구하는 것은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재계약 심사를 다시 해달라는 것이다.

지난 2월 25일 여성부의 심사가 있었고 전씨는 현재 3월 중순쯤에나 나올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상하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모호한 한국 사회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전씨의 주장은 일면 ‘튀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전씨가 경험했던 ‘한국적 상황’, 즉 여성직원이나 부하직원에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상사에 대해 굴욕적일 정도로 복종을 요구하는 공무원 사회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 ‘싸가지 없는 년’‘건방진 년’이란 욕설이 돌아오는,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2, 제3의 전민성씨를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정 희경 기자 chkyu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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