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시인, 서울예대 교수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에리카의 어머니는 딸을 자신의 팔루스로 여긴다. 어머니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을 딸의 피아노 연주에서 찾고자 한다.

어머니는 딸의 전 생활과 시간을 나름대로의 규칙으로 통제하며, 딸이 어머니 이외의 존재와는 접촉조차 하지 않은 채 오직 피아노 연주에만 매달리도록 독려한다. 어머니는 딸을 대중과 구별되는 천재로 의식하고, 딸의 욕망에 쉴새없이 개입한다.

그렇게 되자 딸은 분열증적인 욕망에 휘말려 인간 관계의 불구자로 전락한다. 자신과 타자에 대한 가학과 피학의 소용돌이에서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참다운 연인으로도 살지 못하게 된다. 어머니의 절대적인 간섭이 한 여성의 삶을 피폐의 극단으로 몰고 가는 모습은 잔인하다 못해 전율스럽기까지 하다.

내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나에게 무용을 가르치려 했다. 어쩌면 무용가가 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그토록 발달한 운동신경을 써먹지 못하고 썩힌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성향은 예나 지금이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남의 이목이 집중되는 장소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다리를 번쩍 번쩍 들어올리는 것, 혹은 육체를 움직이는 방법과 우열로 쉴새없이 지적을 받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더구나 무용발표회나 콩쿠르에 나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환한 조명 아래에서 화장한 얼굴로 춤을 춰야 한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게다가 무용선생은 춤추는 동안 계속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울음을 참고 있는데 웃으라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춤을 계속하는 동안 동작의 반주 혹은 춤의 부속물인 줄 알았던 음악이 사실은 내 몸 속에 있었던 것, 몸 속의 리듬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야릇한 몸의 깨달음이 엄습하기도 했고, 저 혼자만 알 수 있는 엑스타시가 엄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발표회가 있던 날, 나는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몇 번의 회전 동작 다음에 절도 있게 동작을 마감하며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는 동작을 멈출 수 없었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이 순간적으로 엄습했고, 나는 그야말로 세상이 노란 물감 속에 잠긴 것 같은 경악 속에서 기절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무용실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나의 어머니도 나에 대한 춤에의 강요를 단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어머니는 에리카의 어머니와는 달리 포기할 줄 아는 분이셨던 것 같다. 그리고 딸의 성향을 금방 알아채 버리는 혜안을 가지셨던 것도 같다.

<피아노 치는 여자>엔 어머니의 바람대로 대 연주가로 성장하지 못한 에리카가 관리하는 사디즘적인 피아노 교습실이 자주 묘사된다. 그 묘사 속에는 가끔 한국 학생들의 연주하는 모습이 양념처럼 등장한다. 물론 부정적인 모습으로. 진정한 연주자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한국 학생들은 그들이 이제까지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받아온 평판 그대로 무감각하게, 정감없이 연주한다.

마음 속으로 작곡가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주한다.

마치 기계가 연주하듯이. 그런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이, 혹은 내가 아이를 나 자신의 팔루스로 삼고 있지나 않나 하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기형아로 만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자괴감,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에리카의 어머니가 아닌가 하는 슬픔이 엄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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