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을 경청하는 집회에는

유권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든든한 백그라운드인 나의 고향들들 다 헤일 듯합니다.

이력서에 하나 둘 새겨지는 고향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고향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요,

가끔 헷갈리는 지역명이 좀 복잡한 까닭이요,

말 안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고향(광주)하나에 추억과

고향(청주)하나에 사랑과

고향(서울)하나에 고독과

고향(대구)하나에 믿음과

고향(산청)하나에 말뚝과

고향(예산)하나에 기대와

고향(전국)하나에 유권자, 유권자.

유권자 여러분,

나는 이렇듯 고향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표(票), 찍, 어(語),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 할머니가 된 계집애들이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봉황,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민족이 아스라이 멀듯이.

유권자 여러분,

그리고 당신들은 내 마음 모를 오리무중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간절한 마음이 담긴 수많은 투표 용지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당명도 써보고 기호도 써보고

지우개로 지워 버렸습니다 .

딴은 밤은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고 나의 고향에도 겨울이 오면,

들녘 산하에 하얀 눈꽃이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적힌 투표 용지에도

자랑처럼 도장이 빵빵 찍힐 게외다.

이 시는 윤동주 님의 ‘별 헤는 밤’을 패로디한 것으로 <이회창 대통령은 없다>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어찌나 감동을 받았는지, 이회창의 8도 고향론(황해도 서흥은 태어난 고향, 충남 예산은 선조 대대로의 고향, 전남 담양은 어머니 고향, 경남 산청은 아내의 고향, 대구는 정치적 고향, 부산은 마음의 고향, 서울은 한때의 고향, 전주는 나의 본관이 서려 있는 고향)을 이보다 더 확실히 드러낸 문구들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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