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7일 페미니스트와 여성 영화평론가들이 만났다. 권은선(영화평론가) 김영옥(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연구위원) 양현아(서울대 강사) 주유신(영화평론가) 씨는 이 자리에서 김기덕의 ‘나쁜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왜 과대평가 됐는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김영옥(이하 영):‘나쁜 남자’라는 영화 제목은 ‘나쁜’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특정한 상황을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런 장치를 이용해 영화에 대해 가해질 수 있는 비판들을 차단시켜 버린다. 영화는 나쁜 남자가 구조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사회를 보여주기보다 나쁨의 성격을 은폐하려고 한다.

현재 관객들은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혹은 ‘작가주의 영화다’라는 식의 다양한 수식어들에 갇혀서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는 통로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다. 경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경험을 구성해 내는 재현의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 <나쁜 남자>는 이성애와 한 남자에 종속된 여자의 사랑만을 옹호하는 가부장제에서 강간과 성폭행, 성적 에로티시즘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식의 다양한 수식어에 갇혀서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는

통로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다”

주유신(이하 유): 김기덕의 전작인 <파란대문>을 볼 때였는데, 영화를 보다가 몸이 괴로워서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그의 영화들을 정치적으로 미학적으로 옹호하고 심지어는 작가의 신전에 올리려는 비평가들을 볼 때도 역시 너무나 불편했다. 따라서 김기덕의 영화는 나에게 여성관객으로서, 비평가로서 이중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의 영화들이 어떻게 남성은 물론이고 일부 여성들에게까지 공감되고 지지받을 수 있는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양현아(이하 현):일부 여성 평론가나 남성 관객들과 의견이 달랐던 지점이 궁금하다.

영:문제는 영화가 내러티브를 어떻게 구성해 나가는가 이다. <나쁜 남자>는 한 비열한 인간을 특정한 캐릭터로 완벽하게 구성해 나가기 때문에 관객들이 거기에 설득 당하는 것같다.

현:감독이 만들어낸 캐릭터나 얘기에 구멍이 많은데도 많은 사람들이 설득당한 것이 페르소나 때문이었다고 본다. 김기덕 페르소나로 불리는 조재현이 많이 기여했다.

또한 이 영화는 한기의 주체 시선과 동일시하고 호흡하도록 한다. 한기란 인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로 가면 나쁜 남자의‘나쁨’이 사라지면서 수용하게 만든다. 감독은 사랑이 아닌 운명에 관한 영화라 하더라.

유:김기덕의 영화들은 한마디로 감독 개인의 차원에서는 ‘성적 배설’이고, 일단 만들어진 그 영화들이 내는 심리적 효과는 ‘사회적 배설’에 불과하다고 보고 싶다. 그것이 ‘성적 배설’인 이유는, 그의 영화들이 어떤 성찰이나 거리두기 없이, 감독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욕망과 환상을 무책임하게 풀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라면, 또한 그의 영화들은 이 사회에서 남성들이 감히 공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극단적이고 과감하게 표출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적 배설’로 밖에 안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즉자적이고 직설적이고 배설적인 영화에 대해서 평론가들이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컬하다.

현: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어떤 면에서 예술적이라고 평가하나.

유:주로 그의 화가 경력을 들먹이며, ‘충격적이고 신선한 이미지’ 또는 ‘계산된 미장센’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수취인 불명> 이후에는 이야기가 취약하다는 기존의 약점을 극복하고 ‘스토리 텔러’로서의 지위까지 얻은 셈이다.

권은선(이하 은):90년대 후반 이후 특정하게 구성된 한국 영화의 지형 속에서, 김기덕 영화가 독특한 위치와 의미를 부여받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조폭 영화로 대변되는 대박 영화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저예산 예술 영화에 대한 옹호이고, 둘째는 국제영화제 수상의 열망 속에서 가장 근접한 가능성으로 김기덕 영화를 주목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많은 부분 국내 평론가들의 ‘김기덕 재발견’은 국제 영화제의 호평에 힘입은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김기덕을 작가로 자리매김 하게 하고 그의 영화를 과대평가하면서 다른 시각과 목소리들을 억압하는 것인데, 예컨대 성정치학적 측면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12-1.jpg

▶권은선

영:그의 해외영화제 수상은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많다. <감각의 제국>을 정치적으로 읽어내고 평가한 서구에서는 김기덕의 영화를 기꺼이 다른 식으로 읽고 싶어하는 역사적 경험의 맥락이 있다. 그의 영화에 대한 특정한 해석학적 틀이 이미 마련되어 있을 수 있다.

또한 한국 영화비평계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영화는 문화산업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그 위상이 급부상했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산업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상과 관객 동원 수에 대단히 민감하다. <수취인 불명>이 서사적 능력까지 획득했다는 그들의 얘기는 서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할 필요성을 오히려 숙제로 남긴다.

<나쁜 남자>가 무엇보다 내게 당혹스러웠던 것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인정해주는 사회이기에 이런 식의 영화가 소위 ‘예술’의 이름으로 ‘감히’ 만들어질 수 있는가 였다. 난 한국 사회에 이것을 용인해주는 성별정치학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이다.

유:김기덕의 영화는 관객에게는 외면당했지만, 비평가들의 호평과 해외영화제 초청으로 인해 주목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마 이런 과정에서 김기덕에게 가져다 준 자신감이 <나쁜 남자>와 같은 영화를 ‘감히’ 만들 수 있게 해준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은:비평가들이 김기덕을 작가주의로 읽어내는 키워드 중에 하나가 ‘위악적’이라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나쁜 남자들과 특히 성차별적, 여성혐오적인 나쁜 행위의 묘사도 독특한 작가적 서명으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

현:컨텐츠 면에서 남성들의 보편적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보편적인 것들을 극단적 사실들로 품었음직한 욕망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는 ‘어떻게 남자한테 침을 뱉어’ 하는 식의 여성들에 대한 위협이 있다.

유:영화 속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남성이 그렇지 못한 여성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모습은 너무나 흔한 소재였지만, <나쁜 남자>는 자신보다 문화적, 계급적으로 우월한 여성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망가뜨리는 남성의 모습을 통해서, 불평등한 성별 위계에 대한 재현의 폭을 더 확실하게 넓혔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여자와 여자의 몸을 동일시

끊임없이 여성을 강간한다

여성은 남성의 정액을 담고 있는

항아리 같은 존재로 그려져 왔다”

현:<나쁜 남자>는 성과 계급이라는 축을 놓고 성별질서가 계급질서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설 수 있었으면 하고 발언한다.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하려고 원하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걸 재현하고 그러한 현실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파란대문>에서는 대학생 여성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여자끼리 반목하는 구조를 만들어 있다.

영:선화는 처음엔 창녀촌에 들어가면서 반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발언이 없어지고 한기가 부여해준 자기 정체성을 수긍해 나간다. 한기가 선화에게 혹은 모든 여성에게 부여한 정의는 ‘너는 여자다. 여자는 근본적으로 성적이고 그리고 여자가 가장 성적일 때는 창녀일 때다. 그때 너는 가장 본질적이 된다’이다. 영화는 이것을 각인시키려고 한다.

은:모든 여자는 본질적으로 성적 존재이자 창녀라는 것이 바로 남성 판타지일 텐데, ‘나쁜 남자’에서 그러한 진술은 영화 중반 한기의 동료가 선화를 풀어주며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선화가 결국은 창녀촌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때 서사적으로 완성된다.

현:영화는 여자와 여자의 몸을 동일시한다. 남성은 여성을 끊임없이 강간하고 사용한다. 여성은 그저 수많은 남성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남성의 정액과 좌절을 담고 있는 항아리 같은 존재로서 교환된다.

~12-2.jpg

◀김영옥

영:가부장제 사회에서 성범죄를 논의할 때 여자의 동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나 이런 식의 권력구조 내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여자의 동의를 얘기할 수 있나. 가부장제 하에선 여자란 남자의 성적 욕망을 발발시키는 근원지일 뿐인데, 그 책임이 온전히 여성의 몸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말이다. <나쁜 남자>는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 구조에 기반한 관음증을 그대로 가시화하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발발시킨 여자가 저항하자 남자는 이제 여자를 특정 상황에 가두고 관음증적으로 통제한다. 선화가 드디어 창녀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인정할 때 한기가 나타난다. 마지막 부분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식의 낡은 메시지로 끝맺음한다.

이때 여성적인 것은 성적인 것으로 여성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남녀의 사랑이 확인되고 갈등이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여성의 성은 교환될 때, 사고 팔릴 때 가장 자연스런 것이란 얘기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 구조를 조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