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창작’을 말하다] “천재 개발자보다는 페미니스트 개발자!”
[‘여성-창작’을 말하다] “천재 개발자보다는 페미니스트 개발자!”
  • 조경숙 만화평론가
  • 승인 2018.10.10 16:09
  • 수정 2018-11-14 2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조력’을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해온 신화 앞에서 ‘펜은 곧 페니스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해야 했던 여성의 역사는 길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규정하는가’라는 권력에 대한 물음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항변도 이미 존재한다. 이 코너에서는 ‘여성-창작-새로움’의 의미망을 확장·갱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동시대 젊은 여성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여성신문이 공동 기획한 이 인터뷰는 문화연구자 오혜진과 만화평론가 조경숙이 함께 총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 여성신문 공동기획

[‘여성-창작’을 말하다] ⑤ IT업계 페미니스트 모임 ‘테크페미’

 

“전구 고칠 땐 아빠, 컴퓨터 고칠 땐 오빠”. 모 회사의 광고 문구다. 으레 여성은 컴퓨터도 기술도 잘 모른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편견을 비웃듯, IT업계에 당당히 ‘페미니스트’ 깃발을 꽂은 여성들이 있다. 바로 ‘테크페미’다. 2016년 열 명 안팎으로 시작한 테크페미는 지금 100여명이 넘는다. 테크페미 멤버 중 4인 임현민, 강영화, 옥지혜, 윤현진을 만났다.

서울 마포구 창천동 한 카페에 테크페미 회원 임현민, 윤현진, 강영화, 옥지혜씨가 모였다(사진 왼쪽부터).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 마포구 창천동 한 카페에 테크페미 회원 임현민, 윤현진, 강영화, 옥지혜씨가 모였다(사진 왼쪽부터).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페미니스트가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으면'

조경숙(이하 ‘조’): IT업계는 남성 비율이 높은 업계죠. 여성이 워낙 소수이다 보니 일터에서도 고충이 많을 것 같아요.

강영화(이하 ‘강’): 남자 디자이너는 본인이 수행한 프로젝트가 유명해질 경우 그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작업물이 소개되는데, 여자 디자이너가 수행한 프로젝트는 그 성과가 남자 디자이너의 성과물에 비해 더 크더라도 소속된 회사의 이름으로 알려져요. 그리고 개발 직군의 성과가 아니면 과소평가되죠. 저는 지금 근무하는 회사에서 회사의 이름을 딴 폰트를 디자인했어요. 폰트의 용량을 최소화하면서도 디자인을 깔끔하게 살려내 큰 인기를 끌었죠. 외부에서는 호응이 컸는데, 정작 회사 내부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어요. 개발 프로젝트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임현민(이하 ‘임’): 이전 회사에서 고객지원 담당이었어요. 고객의 요청사항을 개발팀에 전달하는 일을 했는데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개발팀에서 저를 굉장히 무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직접 개발을 공부했어요.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어요.

조: 같은 IT업계 안에서도 직접 기술을 다루는 개발 직군이 아니면 성과를 인정해주지 않는 문화가 강합니다. 그리고 기술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여성이면 과소평가되고요. 최근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특정 모델의 사진을 업로드하면서 이 모델이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룰 수 있다고 소개했어요. 그때 네티즌들은 ‘해봐야 초보자 수준’일 거라며 해당 모델을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모델은 전문 기술자였어요. 일단 여성이라면 기술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옥지혜(이하 ‘옥’): 저희는 페미니스트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터에서건, 학교에서건,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현실에서요. 그 중에서도 저희가 IT업계 종사자니까, 먼저 우리 업계의 문화를 바꿔보자 싶었죠. IT업계의 팀장급은 대개 남성이고 콘퍼런스에서도 연사는 거의 남성들뿐입니다. 페미니스트 깃발을 딱 꽂고, ‘바꾸자!’ 외치지 않으면 이런 남초 문화가 바뀌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테크페미를 결성하고, 2017년에 연사가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이하 ‘여기컨’)’를 기획했죠.

 

기획자, 서비스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사람

조: IT업계에서 기획자는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옥: 기획자는 어떤 서비스를 왜 만드는지 설계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서비스가 잘 만들어지도록 각 이해 관계자의 의견을 조율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카카오톡이 크게 개편됐는데요. 이때 기획자는 어떤 기능을 넣고 뺄 건지 논의하고, 실제로 그 기능을 구현하는 디자이너‧개발자들과 협의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

조: 기획자는 서비스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군요. 저는 ‘여기컨’에서 육아용품 추천서비스 ‘베베템’ 대표의 발표가 인상적이었어요. 대부분의 육아용품 쇼핑몰에서는 ‘엄마들을 위한 할인특가’ 등 모든 문구에 ‘엄마’를 넣는데, 그분은 의도적으로 ‘엄마’ 대신 ‘부모’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성평등 육아의 철학을 서비스 곳곳에 담아내려 한다고 하셨어요. 테크페미에서도 ‘여기컨’을 여실 때 특별한 철학을 담아 신경 써서 기획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옥: 다양한 여성들이 이 행사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이돌봄방도 운영하고, 다양한 성적 지향을 존중하는 행동강령을 만들었습니다. 또 네트워킹에도 신경을 썼어요. 다른 업계도 비슷하겠지만, IT업계도 새로운 회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인적 네트워킹이 중요해요. 그런데 행사 후에 네트워킹이 이루어지면 아이가 있는 분은 참여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여기컨’에서는 행사 중간에 네트워킹 시간을 길게 할당했어요. 실제로 이 시간에 맺은 인연 덕택에 더 좋은 회사로 이직했다는 후기도 있었습니다.

 

 

밋고(Meetgo)를 런칭한 테크페미 멤버들. (좌측 윗줄부터 시계방향) 김연주, 임현민, 윤현진, 옥지혜, 박지선, 이용상, 강영화, 조영임
'밋고(Meetgo)'를 런칭한 테크페미 멤버들. (좌측 윗줄부터 시계방향) 김연주, 임현민, 윤현진, 옥지혜, 박지선, 이용상, 강영화, 조영임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쓸 만한 서비스가 없어? 그럼 만들지 뭐

조: 최근 오프라인 모임과 행사의 신청을 받을 수 있는 웹 플랫폼 ‘밋고(Meetgo)’를 런칭하셨어요. 그것도 다들 본업이 있는데 별도의 개인 시간을 쪼개서요. 어떻게 선뜻 힘을 모으게 되셨나요?

강: 본래 유명한 오프라인 모임 플랫폼이 있었는데, 그 플랫폼의 대표에게 성폭력 피해 혐의가 제기됐죠. 그 이후엔 그 서비스를 쓰기 싫었어요. 그런데 막상 불매하려니 그 웹서비스를 대체할 수 있는 플랫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테크페미 멤버 중에서 새로운 모임 플랫폼을 만들 사람들을 모집했어요. 소모임 같은 거죠. 그런 후 평일 퇴근 후나 주말을 이용해 시간을 쪼개어가면서 만나 ‘밋고’를 개발했어요.

윤현진(이하 ‘윤’): 전 독학으로 습득한 개발 관련 지식을 실제로 적용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회사에서는 디자이너로 일하지만 ‘밋고’를 만들 때는 개발자로 참여했습니다. 대안적인 모임 플랫폼을 만든다는 의미도 살리고, 개발 이력도 추가한 셈이죠.

조: ‘밋고’가 추구하는 가치가 독특해요. ‘행사 참여자와 개설자가 모두 존중받는 오프라인 모임 플랫폼’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셨는데요. ‘밋고’에서 어떤 모임들이 열리길 바라시나요?

윤: 참여자와 개설자 모두가 안전한 모임이요. 모임에서 누구도 위협당하거나 무시되지 않아야 해요.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자 콘퍼런스를 개최했는데, 콘퍼런스가 끝난 뒤 개최한 파티에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여성 댄서들을 초대했었어요. 이 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했습니다. 여성 참여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기획이었던 거죠.

임: 그 외에도 연사들이 발표 중간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사진을 삽입한다거나, 구태여 성차별적인 비유를 들며 설명하는 일도 많습니다.

강: 사실 어떤 모임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지만, 모임 문화를 바꾸고 싶은 마음도 커요. ‘밋고’에서는 여러 행동강령들을 만들어두었고, 모임을 개설하려면 반드시 행동강령에 동의해야 해요. 행사 참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강령엔 ‘지적 저작권을 지킬 것, 아동성애‧여성비하 콘텐츠를 사용하지 말 것, 성차별 언행을 하지 않을 것’ 등이 포함되어 있어요. 얼마 전엔 ‘안전한 모임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조: 최근 국내 IT 콘퍼런스에서 행동강령을 위배한 사람에 대한 퇴장 조치가 이루어졌어요. 이제 행동강령이 실제 조치로도 이어지는 추세입니다. ‘밋고’의 행동강령도 더 발전시킬 계획이 있으신가요?

옥: 테크페미에서도 멤버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자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금 ‘밋고’에 기재된 커뮤니티 운영 원칙은 기초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인데, 해외의 사례들도 모아 지침을 더 발전시킬 예정이에요. 특히 발표의 이미지 저작권을 확인하는 방법이나 하지 말아야 할 발언 모음 등 여러 가이드라인을 모아 내년 초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강: 저희는 행동강령에 반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어디까지 우리의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등의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어요. 재밌는 건 행동강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질문을 던지다 보니 모임에서뿐만 아니라 내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동시에 하게 된다는 거예요.

 

IT업계에 여성이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

조: 여성들이 대다수인 ‘밋고’ 프로젝트에서 경험하신 일-문화는 어떠셨나요?

임: 회사에서 남성 위주로 일을 할 때는 ‘우리 서로 힘내자’라고 북돋는 분위기라기보다는 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인지를 경쟁하고, 가장 강고한 권위를 획득한 사람의 의견이 관철되는 방향으로 전개돼요. 반면 ‘밋고’를 만드는 동안 테크페미에서는 수시로 서로의 심리 상태를 체크했어요. 이 사람이 지금 괜찮은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세심하게 대화하기 때문에 일하면서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었어요.

옥: 테크페미에서 함께 일할 때도 토론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이 있더라도 그게 개인에 대한 평가로 연결되는 게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일하다가 잘못한 거지, ‘나’라는 사람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가능한 것 같아요.

조: IT업계에 종사하는 여성이 많아지면 어떤 게 달라질까요?

옥: 서비스는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요. 예컨대 인공지능은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잖아요. 그런데 학습하는 데이터 자체가 남성 편향적이거나 백인 중심적이면 인공지능의 반응 자체도 그렇게 따라간다고 해요. 그렇다면 반대로 IT업계에 백인 헤테로 남성이 아닌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 사람들의 서비스가 더 늘어날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진 서비스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선물하겠죠.

윤: 어린이들에게 IT업계에 남성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기술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잖아요.

강: IT업계의 일은 기본적으로 동료들과의 의사소통이 중요한 협업 프로젝트예요. ‘천재 개발자’라고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남성인 경우가 많지만, 천재 개발자가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물론 뛰어난 기술력이 결합되면 훨씬 좋은 서비스가 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협업이 더 중요하죠.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IT업계에 들어와서 이러한 문화를 뿌리 뽑았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테크페미에게 어떤 서비스를 만들고 싶은지 물었더니, 대뜸 “돈 되는 서비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반적으로 여성 기획자에게 예쁘고 아기자기한 서비스를 기대하는데 그런 기대를 꺾고 싶다고. 이 잘난 여성들은 11월 3일 오후 1시 성수동 카우앤독에서 열리는 ‘제2회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에서 만날 수 있다. 참가 신청은 물론 웹서비스 ‘밋고(http://meetgo.kr)’에서.

* 테크페미 IT업계 페미니스트 모임. 2017년에 제 1회 여성 기획자 콘퍼런스를 기획했고, 2018년 7월 오프라인 모임 플랫폼 ‘밋고(Meetgo)’ 서비스를 런칭했다. 오는 11월 열릴 ‘제2회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를 준비하고 있다.

* 장소 협조: 카페 허쉬드

►[‘여성-창작’을 말하다] ① 웹툰 <먹는 존재>, <족하>, <홍녀>의 작가 ‘들개이빨’
http://www.womennews.co.kr/news/144017

►[‘여성-창작’을 말하다] ② 소설집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의 작가 최은영

http://www.womennews.co.kr/news/144347

►[‘여성-창작’을 말하다] ③ 영화 <소공녀>,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영화감독 전고운
http://www.womennews.co.kr/news/144611

►[‘여성-창작’을 말하다]  ④ 페미니스트 드랙 아티스트 ‘드랙킹 아장맨’
http://www.womennews.co.kr/news/144790

 

* 조경숙  만화평론가. <주간경향>에 ‘만화로 보는 세상’ 칼럼을 연재한다. <코믹스 페미니즘: 웹툰시대 여성만화 연구>를 진행했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