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극장] 미투 이후, 건강한 예술계를 위해 싸우는 여성들
[기울어진 극장] 미투 이후, 건강한 예술계를 위해 싸우는 여성들
  • 박영희 연출가·배우
  • 승인 2018.10.08 15:32
  • 수정 2018-10-10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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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잼박스/컴퍼니 배드 소속 연출가이자 배우인 박영희 씨가 10월 7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 ‘연대의 힘’ 국제 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본인 동의를 얻어 일부 수정해 소개합니다. 의견은 saltnpepa@womennews.co.kr로 부탁드립니다.

 

이윤택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문 앞에서 연극연출가 이윤택 성폭력 사건 1심 선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윤택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문 앞에서 연극연출가 이윤택 성폭력 사건 1심 선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월, 수십 년 동안 한국 연극계를 병들게 한 위계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마침내 수면위로 떠올랐다. 연극계의 미투가 초기부터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한국 연극의 대표적 거장이라 추앙받아 온 이윤택과 오태석에 대한 미투가 나왔기 때문이다. 연희단 거리패 출신의 김수희 연출의 미투는 서지현 검사의 첫 공개 미투 이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상징적 사건이 됐으며 이후, 수십년간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침묵하던 다수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그들의 증언을 가능하게 만든 기폭제가 됐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철옹성 같은 이름, 한국 연극사의 거장 혹은 천재라 불리던 이름, 인기와 명예의 상징이었던 이름 앞에는 성희롱 성폭력 가해자라는 타이틀이 달렸고, 그들은 생존자들에 의해 소환됐다. 

광장으로 나온 관객들

이윤택과 오태석, 두 거장의 가해 사실은 연극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품의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인가,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과 소임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남겼다. 특히 이 두 사람은 시기마다 시사성 강한 작품으로 대중과 평단 그리고 관객으로부터 엄청난 지지와 존경을 받아 왔기에 그 충격과 배신감은 더했다. 이는 연극의 최종 완성자인 관객들로 하여금 마로니에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게 했다. 300여 명 이상의 관객은 즉각적, 자발적 그리고 조직적으로 연대해 피해 예술가들에게는 강력한 지지와 연대를 그리고 가해자를 향한 엄중한 경고를 보내며, 혼란 그 자체였던 한국 연극계에 매우 단순하고 명료한 답을 제시했다. “관객은 성범죄자의 공연을 원치 않는다', '공연계 성폭력 아웃(OUT)”. 미투로 인해 수십년 동안 즐겨보던 거장들의 작품을 더 볼 수 없다며 한탄하는 공연계 안팎의 사람들, 예술가의 개인적 일탈 행위나 성격적 결함은 예술가의 작품과는 별개로 논의돼야 한다던 일각의 의견에 대해 관객들은 한 마디로 “사람을 짓밟는 예술은 없다, 예술의 근간은 사람이다!”며 일갈한 것이다. 이 날 관객들은 앞으로 공연 예술계의 건강한 감시자 역할과 함께 피해자와의 연대와 지지를 계속할 것을 천명했다.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지난 2월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연극·뮤지컬 관객들이 지난 2월 2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를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생존자인 ‘나’, ‘우리’가 되다

한국 공연예술계의 미투는 개개인의 자발적 결단과 용기에 의해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과 고발의 형태로 시작됐다. 대부분의 생존자에게 이러한 결단에 앞서 차마 주변의 가까운 동료, 친구 혹은 가족과의 논의나 의견 조율 등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미투 생존자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가늠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안고 대중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이 감내한 2차 피해와 가해자들의 역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령 오태석의 경우 기자회견을 자처했다가 당일 잠적하여 7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아무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들은 물론 여론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침묵은 미투를 고려하던 다수의 피해자들, 그리고 이미 미투를 한 피해자들에게 분노와 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하며 지금도 생존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윤택의 경우 초기에 자신과 당시 극단 단원들을 통한 적극적인 해명을 시도했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세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윤택 생존자들로 하여금 강력한 연대를 불러일으켰고, 그들을 돕기 위한 자발적이고 대규모의 공동 변호인단 구성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연극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총 23인의 고소인단과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이들의 연대는 결국 반년만인 지난 9월 19일 이씨에게 징역 6년, 성폭력 프로그램 이수 80시간, 아동‧청소년 기관 취업제한 10년을 선고받게 했다. 이는 '미투 운동'으로 재판에 넘겨진 유명인 형사사건으로는 첫 실형 선고이며 그동안 가해자 중심의 성폭력, 성희롱 판결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앞으로의 성희롱, 성폭력 판결에 있어 역사적인 판례로 기록될 것이다.

 

극단 단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연출가 이윤택이 9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 후 호송차에 탑승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극단 단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연출가 이윤택이 9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 후 호송차에 탑승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연극인들의 자발적 연대의 시작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

한국 연극계에는 각종 협회가 존재하지만, 실제로 현장 예술가들의 권익과 권리를 보장하고 지켜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에는 연극인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들 협회나 단체들은 공연, 연극계 내의 학연, 지연, 그 외 다양한 인맥에 의해 움직이고 각 분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 단체와 같은 인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이들 협회의 상위 조직 그룹에는 가해자로 지목된 예술가들이 상당수 존재했기에 이들의 대한 불신과 갈등의 골은 미투 이전부터 꽤 깊었다. 지난 2월 미투가 공연예술계를 강타할 때 이들의 무기력함 혹은 무책임함은 침묵으로 때론 한장짜리 성명서의 형태로 단적으로 표현됐으며, 이는 결국 젊은 현장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연대체의 구성을 절실하게 했다. 지난 2월 21일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150여명이 넘는 신구세대의 연극인들이 한데 모여 장장 7시간에 걸친 대토론 끝에 22일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을 출범하고 피해자 지원 등 계획을 밝혔다.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은 이날 입장문에서 “그동안 연극 현장에서는 다양한 층위의 폭력이 있었고, 위계적 구조에 의해 더욱 강화됐다”며 “우리는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무대뿐 아니라, 창작 과정까지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을 직시하고 성찰하지 못했다”고 반성의 뜻을 밝혔다. 

이들은 피해 사실을 알릴 상담창구(theaterwithyou@hotmail.com)를 마련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예방, 철저한 피해자 중심의 사고·행동 등 구체적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성반연은 결성 당시 약 30여명이 넘는 현장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업무를 분담하고, 매주 이어지는 수평적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 월요 모임의 조직과 운영, 각종 포럼 진행과 미디어 언론 대응, 현장 예술가뿐 아니라 예술 대학 내 피해자들에 대한 각종 지원과 연대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나아가 현재 논의 중인 문화 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근절을 위한 법안 마련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현장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법안에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외 공연계와의 연대- International Sisterhood

① 한국과 대만의 국제 연대 사례 

 

2017년 11월 9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린 2017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오태석 연출가. 그는 지난 2월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당했고, 이후 아무런 입장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2017년 11월 9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린 '2017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오태석 연출가. 그는 지난 2월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당했고, 이후 아무런 입장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4월 오태석 피해자들은 뜻밖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극단 목화의 대표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루마니아, 대만 해외 공연이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강행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목화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됐기 때문이다. 2월 말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던 오태석은 전년도 예술경영 지원센터로부터 받은 해외공연 지원금에 극단 자부담을 더해 루마니아 국제 셰익스피어 연극제와 대만 국립전통예술센터의 초청 공연을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다.

이에 생존자들과 성반연 그리고 공연예술계의 다양한 연대체들이 즉각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우선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해명을 요청했는데, 올해가 아닌 전년도 사업으로, 해외 공연 기관과 연관된 사업이라 공연을 취소하면 막대한 수수료를 물어야 함은 물론이고 국가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루마니아 공연이 며칠 남지 않은 상태에서 공연 취소는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는가 하면, 오태석 당사자는 지원에서 배제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예경의 답변은 시대와 역행하는 공연행정 기관의 안일하고 위험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오태석 피해 당사자들과 연극계 안팎의 공분을 뒤로 한 채 극단 목화는 루마니아 공연을 강행했다.

이후 대만 공연이 단 열흘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호주 공연예술계 동료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대만 공연계의 대표적 지한파이자 여성 공연 프로듀서 란 베이츠와 연락을 취해 목화의 대만 공연이 대만 공연예술계와 관객들에게 얼마나 기만적인 행위인지 역설하고, 공연 취소를 위한 대만 예술가들의 즉각적이고 강력한 연대를 호소했다. 이에 란 베이츠는 즉시 대만의 공연 예술계 동료들과 격론 끝에 대만 언론에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대만 사회에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대만 언론을 통해 기사가 나가고 하루가 지나기 전인 5월 3일 저녁 대만 국립전통예술센터는 목화의 공연 취소를 전격 발표했다. 짧은 시간 안에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대만과 한국 공연 예술 국제 연대는 해외 초청 공연 취소라는 전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결과를 이뤄 냈다. 필자와 란 베이츠는 개인적인 친분이나 일면식조차 없는 사이였지만, 이 일을 계기로 서로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지지를 보내며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② 스웨덴 여배우들의 연대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다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지난 여름, 미투의 격랑 한복판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자 잠시 한국을 벗어나 스웨덴에 살고 있는 동생의 집에 기거하게 됐다. 귀국을 2주 앞둔 어느 날, 스웨덴 국영 방송 기자인 제부에게 스웨덴 예술계의 미투 운동에 관해 물었다. 복지 선진국 스웨덴은 다를 거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북유럽 국가 중 최초로 스웨덴에서 미투 운동이 촉발됐으며, 연극, 공연, 영화 그리고 TV 연기자에 이르기까지 500명이 넘는 여배우들이 한날한시에 공동 성명을 내고 단체 미투를 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피해자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동시에 장르를 아우르는 여배우들의 연대를 통해 미투의 폭발력을 몇 배로 증폭시키는 영민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스웨덴을 떠나기 전 그들을 직접 만나 답을 듣고 싶었다.

제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스웨덴 배우조합의 의장이자, 미투 운동을 이끈 수잔나 딜버(Suzanna Dilber)와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 부분에 노미네이트 된 배우이자 연출가인 바하르 파스(Bahar Pars)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일면식도 없는 무명의 한국 배우의 이메일에 과연 답을 해줄까 하는 우려와 달리, 바하르 파스로부터 답이 왔고 며칠 뒤 스톡홀름 시내에서 바하르를 만났다. 우리는 첫눈에 우리 가운데 이미 자리한 끈끈한 동지애와 연대의식을 확인했다. 바하르는 개개인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용기를 내고, 그 용기가 사회 전반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한국의 미투 운동 양상에 놀라움과 경의를, 나는 500여 명이 넘는 여성 예술가들이 연대하여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용기와 결단에 찬사를 보냈다.

바하르에 따르면 미투 이후 스웨덴 대중의 반응, 미디어의 2차 가해, 가해자들의 대응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스웨덴 내 미투 운동 이후 예술 창작 현장의 반응이다. 스웨덴 공연·영화·예술계가 미투운동 이후 취한 실질적 행동은, 가해자들의 행위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닌 망가진 예술 생태계에 의해 생겨난 ‘현상’ 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약 1시간 반에 걸친 바하르와의 인터뷰로 나는 스웨덴 여성 예술가들의 연대 사례를 한국의 공연예술계 동료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의지를 더 굳게 다졌다. 그에 화답하듯, 스웨덴의 수잔나 딜버가 늦은 답장을 통해 언제든 도움과 지지 연대가 필요하다면 함께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나는 그녀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오늘 10월 국제 포럼을 함께 계획하기 시작했고 여러 동료들의 헌신적인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오늘 이 자리를 실현하게 됐다.

자율적 규범 속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보다 : ‘시카고 스탠다드’ 

 

결국 공연 예술계의 미투 운동은 오랜 시간 망가진 공연 예술 생태계의 자정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공동의 소명의식을 예술가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막막하고 거대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나는 스웨덴 여성 예술가들과의 대화 속에서 소위 문화 예술 선진국들의 성희롱, 성폭력 그리고 온갖 차별과 폭력에 대처하는 그들의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 미국과 호주 뿐 아니라 다수의 영어권 국가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시카고 스탠다드를 알게 됐다.

시카고 스탠다드는 오디션 과정부터 연습, 공연 종료 시점까지 제작 환경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반영한 현장 백서로, 시카고 극단의 공동 대표인 로라 피셔(Laura T.Fisher)에 의해 만들어진 자율성을 전제로 한 실제적 규약집이다. 법적 구속력이나 강제성은 없으며 각 지역, 문화, 작업 현장에 맞게 변형해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단어 하나하나에 현장 예술가이기에 가능한 통찰과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지난 2~3년간 미국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시카고 스탠다드는 미국 전 주에 널리 알려지고 통용되고 있다고 했다. 때문에 로라 피셔는 워싱턴 정가를 포함한 미국 전역을 돌며 강의와 토론자로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즉시 미국 연극계의 지인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했고 이틀 뒤, 로라 피셔 본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며칠 뒤, 로라와 약 2시간에 걸쳐 전화로 시카고 스탠다드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한국 미투 운동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한국 현실에 맞는 미래의 코리아 스탠다드를 만들기 위해, 그녀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국제 포럼을 내년 2월 한국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무모함에서 시작된 행동이 한국뿐 아니라 나라 밖의 훌륭한 동료들과의 네트워킹으로 이어지면서, 나로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 곳곳에서 분투 중인 수많은 예술가들과 연대해 예술가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그 어떤 위력이나 불의 앞에 당당히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아직은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완벽한 안전 지대는 없어 보이지만, 안전하고 건강한 예술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싸우고 있는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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