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번안/연출 김민기)은 국내 공연계의 전설이다. 초연 연도인 1994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4천회의 공연이 이뤄졌다. 그 15년간의 관람 연인원은 70만6천명. 지금은 관객 기준으로 '지하철 1호선'의 기록을 깬 소극장 뮤지컬이 더러 있지만 이 작품은 탄생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줬다. 5인조 밴드의 생연주는 관객을 열광하게 했다. 사회성이 짙은 내용을 담아낸 것도 이 뮤지컬의 작품성을 크게 높였다. 작품은 지하철 1호선을 탄 인간 군상을 통해 치열한 경쟁에서 치이고, 소외된 계층의 모습을 애절하게 담아냈다. 한국 사회의 어둡고 부조리한 일면에 대한 풍자적인 장면들은 자주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고, 작품의 대중성을 높이는데 큰 몫을 했다. 훌륭한 배우들을 길러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유명해진 황정민·김윤석·설경구·장현성·조승우 등이 이 뮤지컬을 거쳐 갔다.

 

이 '전설'의 뮤지컬이 9월 8일 4천1회째 공연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100회 공연에 돌입했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Linie 1'을 한국 상황에 맞게 번안한 이 작품은 백두산에서 만났던 애인을 찾아 서울에 온 중국 옌벤 처녀가 지하철 1호선 안팎에서 맞닥뜨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녀, 노숙자, 사기꾼, 자해공갈범 등 주로 밑바닥 인생들이다. 김민기 연출은 이런 사회적 낙오자들의 아픔과 좌절감, 그리고 이들이 품고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극의 전개과정에서 여성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점은 '지하철 1호선'의 중요한 특징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옌벤에서 온 선녀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 그녀가 찾고 있는 애인 제비는 사실은 사기꾼이다. 그녀를 비롯한 여성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이 이처럼 추악한 욕망과 부조리로 그득한 사회의 피해자들이다. 창녀 걸레는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지하철역에서 몸을 던진다.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 가려는 의지 역시 여성 캐릭터가 전달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서울역에서 어렵사리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곰보 할매는 "산다는 게 참 좋구나, 아가야. 이제 새 날이 시작되니 더더욱 좋아."라고 노래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런 밑바닥 인생들 사이에 밍크코트를 걸치고 쇼핑을 가는 '강남' 여자들도 끼어든다. 이번 작품을 위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11명의 배우가 잦은 의상교체 과정을 통해 97개 역을 바쁘게 소화해내는 것을 보는 것은 극이 주는 큰 재미다. 신진배우들의 노래, 역동적인 춤과 연기는 예전에 이 작품을 볼 때의 추억과 감동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10년 만에 다시 대학로 무대에서 선보인 '지하철 1호선'은 내용과 형식이 이전 버전과 큰 틀에서 변함이 없다. 무대디자인은 똑같다. 무대 상단은 세 부분으로 분할해 양쪽에 5명의 연주자를 두 그룹으로 갈라 세우고 가운데를 연기공간으로 잡았다. 무대 하단은 각 지하철역과 청량리 588 등 역 주변, 객실 내부 등으로 활용하는 한편 장면에 따라 이동식 9단 계단으로 상하무대를 연결했다. 연주악기 중에는 예전에 색소폰이 끼어 있었으나 바이올린으로 대체됐다. 무엇보다도 극의 시공간이 전혀 달라지지 않고 '1998년 11월의 서울'에 멈춰 있다.

사실, 최소한 10년 이상 전의 버전을 거의 그대로 다시 무대에 올린 것은 이 작품이 갖는 큰 약점이다. 공연예술이 동시대의 모습과 정신을 비추는 특성을 가진 장르라는 전제 아래서다. 극중 중요한 공간 중 하나인 청량리 588 집창촌은 이제 어슴푸레한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요즘 "IMF 금융위기 때 보다 살기가 더 힘들다"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1998년과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지하철 1호선 안의 풍경은 대학로를 즐겨 찾는 젊은 세대의 기준에서 보면 매우 비현실적이다. 지하철 안에서 옛 연인 사이인 영자와 병태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은 아무리 웃음을 주기 위한 장면이라 하더라도 흡사 신파극을 보는 듯하다. 번안을 한 김민기 연출이 최근 JTBC 뉴스룸과 인터뷰한 내용에는 이에 관한 답이 들어 있다. 시대배경을 바꾸지 않은 것은 "그 시절의 기록물로 그대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의도를 처음 밝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2006년 초 '지하철 1호선'의 3천회 공연에 즈음해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90년대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소중한 자기 모습을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같은 취지의 말을 했었다.

기록물로서의 가치, 아니면 '지금, 여기'의 모습과 정신을 담아내는 공연예술로서의 가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오롯이 관객에게 달려 있다. 공연은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12월 30일까지.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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