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성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24

70년이 걸렸다. 2018년 4월 12일,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사법부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2 판결). 워낙 중요한 판결이기에 세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같이 살펴보자. 일부 문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기본적 내용과 취지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읽기 편한 문장형태로 필자가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이 판결은 이렇게 말한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참조).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벌써부터 지치는 느낌이다. 잠시만 쉬었다가 좀 더 읽어보자. “피해자는 이러한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권유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그에 관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 이제 대법원의 정말 중요한 판단이 나온다. “이와 같은 성희롱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누가 판결문 아니랄까봐 문장은 길고 복잡하며 어투는 ‘고색창연’하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내용이 변경되지 않는 범위에서 필자가 몇몇 문장은 임의로 짧게 잘랐다. 그래도 길다. 하지만 숨이 차오더라도 모든 문장을 빠짐없이 천천히 읽어내려 가면서 꼭 한 번 숙지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구절들이다.

‘판결문’스럽게도 표현 하나하나가 쉽지는 않지만, 곱씹어 보면 대법원이 하고자 하는 말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거다. 당신이 피해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해 올 수 있었을지 바로 그 피해자의 관점에 서서 잘 생각해 보라는 거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피해자는 취약한 상태나 지위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 이후에 가해자와 계속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피해사실이 있었음을 부정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 신고가 조금 늦었다 해서 이것이 피해자 진술을 믿지 못할 이유가 될 수도 없다는 것, 다소 소극적으로 진술한 점이 있었다고 해도 이 또한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라는 것이기도 하다.

 

위 판결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 피해자의 처지와 관점을 숙고하라고 주문한 것이지만, 비단 법원의 심리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 또는 일반 사기업체 내에서 성희롱 관련 고충사안을 심의할 때에도 마찬가지의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조사위원 또는 심의위원 등으로 관여해 오면서 필자가 놀라우리만치 반복적으로 맞닥뜨렸던 가해자 측의 항변사항이 있다. ‘그 당시 상황 전체를 잘 보아주세요. 그 날 신고인도 그 자리에서 나하고 함께 웃고 농담도 나누며 많이 떠들기도 하고 즐거워 했었다구요. 술자리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는 집에 잘 들어가시라고 이모티콘 달린 메시지도 신고인이 먼저 나한테 보내줬다니까! 이런 상황에 그게 무슨 성희롱! 성희롱이 있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맞죠?’

‘어이쿠! 피신고인께서 콕 집어 말씀 안 해주셨으면 제가 깜빡하고 놓칠 뻔 했군요! 벌써 어디선가 열 번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를 또 다시 이렇게 장광설로 늘어놓아 주시기까지 하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맞는 말이기는 무슨. 고맙기는 또 무슨. 필자가 정말로 고마워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일반적인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현장에서라면 필자도 불쾌한 말이나 행동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가급적 그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거부의사를 표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비교적 수평적인 동료관계 하에서도 그 자리에서 즉시 불쾌함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5~60대쯤 된 고위직 임원이나 교수 같은, 누가 봐도 ‘높디높은 하늘같은 어른이’께서, 2~30대 신규직이나 인턴, 학생 같은 ‘어린이’를 앞에 데려다 앉혀두고서, ‘남친이 있느냐. 나는 남친으로 어떠냐. 안아 달라. 뽀뽀해 달라. 안고 뒹굴고 놀자.’ 운운하는, 실로 인간의 말 비슷하지도 아니한 헛소리를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다면 오죽하랴!

이런 상황에서 별 다른 힘도 없는 2~30대 ‘어린이’가 “허이구, 어디서 노망 나셨수? 아니면 점심에 뭘 잘못 드셨나? 무슨 망아지 같은 소리요?”라고 하면서 명시적인 거부의사를 과연 그 자리에서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가?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아마 필자라면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이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기대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이처럼 필자 스스로도 하기 힘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라고?

필자가 여러 사건 조사 중에 검토해야 했던 대화록이나 메시지 기록 등 다양한 증거자료에서는 가해자의 성적 언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말에 맞장구를 쳐 주고 함께 농담을 늘어놓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상황이 다수 있었다.

물론, 일부의 경우에는 아무리 들여다보고 분석해 보아도 성희롱이 있었던 것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례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성희롱이 있었고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었다면 ‘맞장구’와 ‘정상적 대화’처럼 보이는 상황 그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필자는 숱하게 보았다.

‘정상적 대화’였다고? 이는 말 그대로 ‘표면적’이고 ‘피상적’으로 슬쩍 읽었을 때에나 그렇게 보이는 외관이었을 뿐이었다. 꼼꼼하게 현상의 이면을 잘 들여다보면, 더 정확히 말해서 그 피해자의 입장과 관점을 조금 더 깊이 공감하고 고려한 이후에 다시 들여다보게 되면, 그때부터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는 실체는 어떻게든 화제를 다른 내용으로 돌려보고자 하는, 대화상황을 조속히 종결짓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분투하는 피해자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또는 적어도 아랫사람으로서는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법한 ‘높으신 분’ 면전에서 피해자로서 취할 수 있을만한 가장 합리적인 회피 방법은 겉으로는 웃는 낯으로 애써 맞장구도 일부 쳐 주면서도, 어떻게든 조속히 자리를 파하려고 이리저리 화제를 돌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 말고 달리 특별한 방법이 정말 있었을까? 당신에게는 혹시 다른 방도가 있는가? “나 원, 별 미친 인간 다 보겠군! 이런 따위의 회사를 내가 더 다닐 이유가 없지!”라고 하면서 시원하게 뺨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도 ‘이방카 트럼프’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지 않을까?

위의 대법원 판결도 대학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하였던 성적 언동이 실제로 있었는지, 그리고 그 언동들이 성희롱에 해당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문제되었던 사안이었다. 특히 대학교수와 학생처럼, 상당한 위계서열 차가 있는 관계에서의 언동 유무 및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면서 성인지 감수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 원칙을 특별히 강조하였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조금만 더 읽어보자. 그래서 법원은 이렇게 판시했다. “원심(제2심 법원)이, 원고(가해자)와 피해자의 대화 가운데 극히 일부분을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자체는 옳다. 그러나 원심이, 원고가 평소 학생들과 격의 없고 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주 농담을 하거나 가족 이야기, 연애상담을 나누기도 한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성희롱이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부분은 수긍할 수 없다.”

옳거니! “그리고 원심이, 원고가 피해자에 대하여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한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이는 원고의 적극적인 교수방법에서 비롯된 것이고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 이후에도 계속하여 원고의 수업을 수강한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원고의 행위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에 이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부분도 수긍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유 설시는 자칫 법원이 성희롱 피해자들이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은연중에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를 내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대법원은, “원고의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가해자가 교수이고 피해자가 학생이라는 점, 성희롱 행위가 학교 수업이 이루어지는 실습실이나 교수의 연구실 등에서 발생하였고, 학생들의 취업 등에 중요한 교수의 추천서 작성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루어지기도 한 점, 이러한 행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정황이 있는 점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우리 사회 전체의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판단하였어야 옳았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성인지 감수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공정한 관점에 입각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피해자의 특수한 입장과 처지에 공감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피해자와 똑같은 처지에 놓였을 때,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을 보다 깊이 공감하는 한에서만 비로소 제대로 된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같은 처지의 피해자였다면 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 대처가 무엇이었을까’ 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며 숙고할 때, 사건의 진정한 실체에 우리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대법원의 4월 12일 판결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진지한 각성을 촉구한다. 진실한 피해자의 호소를 무심코 간과하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가해자의 그럴 듯하고 번드르르한 변명에 우리가 무분별하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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