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가정폭력]

탈가정·자립하려는 젊은 여성들 ②

성장기에 가정폭력을 겪은 여성들은 으레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이거나, 어딘가 결함이 있는 요주의 인물로 여겨진다. 편견이 이들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도록, 여성신문은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자립해 살아가려는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생계 불안, 낙인, 고립, ‘손쉬운 범죄 타겟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설계하고 다른 피해생존자들을 도울 역량을 기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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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도, 가정폭력을 벗어나 자립하려는 젊은 여성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냉랭하다. 체계적인 직업훈련을 못 받은 채 노동시장에 뛰어들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주 그만두거나 이직을 반복하기도 한다. 경력을 쌓지도 목돈을 모으지도 못하고 ‘불성실’ ‘무책임’ 낙인이 붙는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기도 일쑤다. 개인이 아닌 ‘가족’을 기본 단위로 기초생활을 지원하는 한국 복지 체계 때문에 최소한의 지원도 받기 힘들다. ‘고립’과 ‘빈곤’이 이들 자립의 키워드다. 

가정폭력 피해 자립하려는 20대 여성들

학업·알바 병행 노력하지만

당장 생계 어려워 진로 불안

병원비 무서워 기본검진도 미뤄

‘문제아 아냐?’ 차가운 시선도

 

‘하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웹툰 ‘쉼터에 살았다’의 한 장면. ⓒ네이버웹툰
‘하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웹툰 ‘쉼터에 살았다’의 한 장면. ⓒ네이버웹툰

‘하람’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가정폭력에 관한 온라인 게시글을 읽다가 퍼뜩 그게 자기 얘기임을 깨닫고는 집을 나왔다. 반년 넘게 고시원에 살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 생계를 유지했다. 주 3회 마트 계산원 아르바이트 등을 해 월 50만원 정도를 벌어 “쓰레기장 같은 고시원 방”에서 7개월간 살았다. 열심히 사는데도 경제난과 우울증은 심해지기만 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접 쉼터를 찾아갔다. 약 4개월간 살다가 최근 퇴소했다.

“계속 혼자라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도움이 절실한데 쉼터 등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방법이 무엇인지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고요. 계속 일하는데 상황은 좋아지지 않으니 나는 왜 이렇게 죽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만 하는지 억울했고, 우울증이 깊어졌을 때가 가장 힘들었죠.”

지금은 직장을 얻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진로나 인생 계획을 세우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만화 공부를 하려고 들어간 대학은 1학년 1학기를 끝으로 포기했다. 4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다. 

‘킴’(24)과 ‘곰곰’(23)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 사연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10대 때 집을 나와 자립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지금은 함께 산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다 보니 수입이 드문드문한데, 월세 등 기본 지출은 줄일 수 없어 걱정이다. 병원비가 무서워 기본 검진도 미루고 있다. 돈 문제로 집주인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젊은 여자들이 가족 없이 모여 산다는 이유로 ‘문제아들 아니냐’며 경계하고 수군거리는 이웃도 있다. 

“정말 힘들게 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국가 지원은 거의 없어요. 지역 공동체의 인식도 그리 좋진 않고요. 스스로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 역량을 봐줬으면 좋겠는데....”

‘정상가족’ 중심 사회서

집 나온 젊은 여성은

복지 지원도 존중도 받기 어려워

쉼터 상담사·청소년단체 활동가 등

도움·조언·지지가 큰힘 돼

“자립은 ‘더불어’ 살 때 가능”

결국 ‘정상가족’ 중심의 기존 정책·제도가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고 여성들은 말했다. “원가족과 선을 긋고 살고 싶어도, 금융·복지·의료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제도적으로 얽매여 있어서 괴롭다”고 입을 모았다. 심각한 생계난에 처했지만, 연을 끊은 부모의 소득과 사유재산까지 따져 자격을 부여하는 현 제도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을 못 받는 여성도 있다. 병원에서 큰 수술이라도 받으려면 ‘보호자’인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부부라면 이혼하면 그만이지만 혈연은 법적으로 끊을 방도가 없어 더 괴롭다. 

여러 어려움을 겪고도 이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살면서 스스로 삶을 결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막막하기만 한 순간을 지나 자신감을 얻고 새 삶을 모색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보호시설 직원이나 청소년·인권 단체 활동가, 때론 낯선 이들의 도움과 조언, 지지가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결국 자립은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게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의 공통점이다. 

‘하람’은 수도권의 한 회사에서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최근 정규직이 됐다. 내년부터 사이버대를 다니며 청소년 교육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탈가정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쉼터 생활기를 그린 웹툰 ‘쉼터에서 살았다’도 계속 연재할 예정이다. 쉼터 상담사의 제안과 격려에 힘입어 시작한 웹툰으로, 생계 문제로 잠시 연재를 중단하기 전까지 온라인상 호응을 얻었다. 관련 정책·제도를 알리는 만화 콘텐츠도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킴’과 ‘곰곰’도 청소년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고 청소년들을 돕는 활동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대학에서 청소년복지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관련 단체를 꾸준히 찾아 상담이나 사무 업무를 맡아 보면서 역량을 쌓고 있다. “청소년들이 아직도 자기 얘기를 하기가 어렵잖아요. 대신 싸워줄 사람, 친구 같은 활동가가 되고 싶어요.”(곰곰) 

정 씨는 자신처럼 성착취 피해를 겪은 10대 여성들을 돕고자 내년부터 관련 지원단체에서 일할 예정이다. “이렇게는 못살겠으니 아무나 나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단체에 연락했을 때,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운 활동가들” 때문에 내린 결정이다. 가정폭력 때문에 한때는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부인하려 했던 김 씨는 지금 지역 내 성소수자 모임·퀴어퍼레이드 등 여러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제야 저를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났어요. 앞으로 저처럼 힘들어하는 소수자들을 위해 제가 할 일을 찾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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