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자 시민단체 회원들이 안 전 지사에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출석하자 시민단체 회원들이 안 전 지사에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위력은 있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는 모순된 요지의 ‘안희정 사건’ 1심 무죄 선고로 인해 온 나라가 ‘위력’이란 대체 무엇인지 해답 찾기에 빠진 것 같다. 이번 판결에서 시민의 ‘합리적 이성’을 납득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한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 조병구(재판장), 정윤택, 황용남 판사를 대신해 개개의 언론과 시민이 자기 견해와 경험을 통해 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허나 공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희정 사건’에서 작동한 위력의 실체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한 것 같다. 모든 위력 관계에는 일반화할 수 없는 개개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차기 대권주자로 불린 전도유망 ‘했었던’ 재선 도지사와,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몇몇 부처의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무보수로 당내 지지율 2위 대선 경선 후보 캠프에서 일을 시작한 30대 ‘여비서’의 위력관계였다. 이 정도의 특수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강제력과 전문성을 가진 어떤 기관이, 이를테면 법원이, 많은 비용을 치러 관계자들을 일일이 심리하고 증거물을 분석해 100쪽 쯤 되는 결과보고서 정도는 만들어야 했다. 한데 아시다시피 어느곳도, 이를테면 법원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특수성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이론과 개념을 가져와 역사적 보편성으로 ‘안희정 사건’의 위력을 설명하려 했다. 그 시도들이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관한 시민의 이해와 지각을 풍부하게 한 것은 확실하나 그것으로는 “안희정 사건 피해자는 왜 성폭행을 당한 다음 날 정상적으로 일했나?” “피해자는 왜 안희정과 친근해 보이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나?”와 같은 구체적인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법원이 제 의무를 기만했으므로, ‘안희정 사건’ 위력의 실체에 보다 접근하기 위해선 비슷한 위력의 자기장 아래 살아가는 자들이 더 많이 입을 열어야 했다.

8월 14일 1심 선고에서 꼭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정치권에서는 재판부와 안희정을 비판하는 야당의 성명 발표, ‘비동의 간음죄’ 도입 토론회와 법안 발의, 선고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몇몇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외롭게 부유하다 사라졌다. 모두 의미 있는 반응이었으나 사건의 본질인 위력의 문제를 건드리지는 않아 아쉬웠다. 나라도 뭔가를, 부족하지만 무엇이 되었건 정치권의 특수한 위력을 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성신문>에 무작정 연락해 지면을 부탁드렸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꺼내볼까 한다. 나는 201n년 국회 A상임위원장실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출근일에 생전 첫 경험을 100개 정도 한 것 같다. 생전 처음 업무로써 남이 마실 차를 탔다. 내 얼굴이 카페 간판으로 보이기라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들 ‘의원님’ 입맛을 줄줄이 늘어놨다. 예고 없이 들른 방문객에게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다가 어떻게 자기를 모를 수 있느냐며 혼이 났다. 모르는 사람을 모르는 게 잘못이었다. 저녁 6시가 넘으니 외부 행사 수행을 가야 했다. 우물쭈물하다 때를 놓쳐 점심도, 저녁도 먹지 못한 채로 대사관 주최 리셉션, 지역구 효도 콘서트까지 들렀다가 11시가 넘어 퇴근할 수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영혼까지 허기지는 기분이었다. 다음날부터 아무리 바빠도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 밥이라도 잘 먹어야 했다.

나는 금세 국회의 공기에 적응했다. 모든 말에 “네. 알겠습니다”로 대답했다. 국회 권력도 최하계급인 ‘인턴 여비서’였던 내게는 복종과 충성의 말만 허락됐다. 질문이나, 반문은 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걸 다 내 잘못으로 삼았다. 국회에선 직급이 낮을수록 잘못이 많았다. 비가 내리는 것도, 차가 막히는 것도 다 내 잘못이었다. 영문 모를 사과를 하루종일 했다. 수행에도 제법 능숙해졌다. 의원 눈빛만 봐도 지금 사진을 찍으라는 건지, 이동을 준비하라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의원은 보좌진에게 서슴없이 자기 밑바닥을 보였다. 마음에 조금만 차지 않아도 화를 냈고, 뭐든 내키는 대로 굴었다. 노골적인 출세욕, 기회주의자적 면모, 실력의 밑천, 질투, 가식 그 전부를 부끄러움 없이 드러냈다.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쌓이며 의원이 언제 크게 화를 내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약점을 감추고 보호해야 하는지 짐작하고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나는 위력의 자기장 아래로 들어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타협불가능한 존엄과 가치가 있다는 오래된 믿음을 스스로 조금 허물어야 했다. 눈앞의 모든 사람을 굽신거리게 하고, 전화 한 통으로 비행기도 멈춰 세우는 의원의 위력을 체험할 때마다 공포로 몸이 굳었다. 그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밤낮 주말 없이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다. 이유 없이 화풀이를 당해 울면서도 울어서 죄송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만두면 되는 게 아니냐고 했다. 한데 이것도 직업이라서 그만둔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안희정 사건’을 통해 정치권의 폭압적이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위력관계의 일부가 공개됐음에도 예외 없는 위력 행사의 당사자들은 먼 산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특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기 당 기호를 받고 출마해 두 번이나 도지사에 당선된 정치인의 보좌진이었고, 그의 경선 패배 후, 최종 후보자 캠프로 옮겨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피해자를 원내 정당 중 유일하게 외면했다. 인권, 여성을 주요 정책 아젠다로 삼아온 민주당 의원들도 정춘숙, 금태섭 의원 정도를 제외하곤 전당대회,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입을 다물었다. 이들은 ‘안희정 사건’ 1심 무죄판결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믿음에 얼마나 큰 균열과 절망을 만들었는지 과소평가하고 있다. 환절기 같은 평화는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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