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 기일에 치러진

자매의 첫 장례식

빈소엔 자매 영정사진과

가해자로 지목된 12명

이름 적힌 피켓 나란히

 

‘단역배우 자매 사건’ 어머니 장연록씨가 8월 28일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두 딸의 빈소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장씨 옆으로 가해자로 지목된 12명의 이름이 적힌 피켓이 놓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단역배우 자매 사건’ 어머니 장연록씨가 8월 28일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두 딸의 빈소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장씨 옆으로 가해자로 지목된 12명의 이름이 적힌 피켓이 놓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우리 보물들, 잘 가거라. 이제 조금 홀가분하네. 엄마가 원수 갚고 따라 갈게.”

어머니 장연록씨는 8월 28일 자매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놓인 빈소에서 두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두 딸에게 절을 하는 장씨의 오른쪽엔 가해자로 지목된 12명의 이름이 적힌 피켓이 놓여 있었다.

서영(가명·당시 34세)·서진(가명·당시 32세)씨의 죽음은 성폭력과 이후 이어진 2차 가해로 인한 죽음으로 세상에 ‘단역배우 자매 사건’으로 알려졌다. 어머니 장씨는 자매가 세상을 떠난 지 9년 만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장례식장 한 켠에 마련된 자매의 추모 공간.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례식장 한 켠에 마련된 자매의 추모 공간.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단역배우 두 자매 사건은 사회적 고립 등 2차 가해로 성폭력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2004년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서영씨는 당시 반장 등 12명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사회적 고립과 수사관의 2차 가해로 괴로워하던 그는 5년 후인 지난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건물 18층에서 몸을 던졌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언니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준 동생 서진씨도 세상을 등졌다. 연이은 두 딸의 죽음에 어머니 장연록씨는 충격을 받고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자매의 빈소는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에 마련됐다. 빈소 앞에는 민갑룡 경찰청장의 근조 화환이 서있었다. 장례식은 오전 11시 추모 예배로 시작됐다. 평소 어머니 장씨가 다니던 교회 교인들 30여명이 기도와 찬송으로 자매를 추모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장례식장에 보낸 근조 화환이 빈소 입구에 놓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민갑룡 경찰청장이 장례식장에 보낸 근조 화환이 빈소 입구에 놓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례식장 한쪽 벽은 자매를 추모하는 전시공간으로 마련됐다. 어린 시절 가족 사진부터 졸업식과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 벽을 가득 채웠다. 사진 속 자매와 어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켠에는 추모객이 적은 메시지도 보였다. “몰랐다는 이유로 침묵했던 것 조차 죄스럽게 느껴진다.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고 함께 하겠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날들 이제 편히 쉬시길 기원합니다” “이 사건 잊지 않겠습니다” 등 애도의 글이 적혔다. 장씨도 ‘나의 딸들께’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그동안 우리 딸들의 엄마여서 행복했고, 엄마! 라고 불러줘서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훗날 엄마 만나면 늙었다고 못 알아보면 안됩니다. 잘 가라, 잘 가라”라며 딸들을 배웅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12시 30분경 장례식장을 찾아 자매를 추모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12시 30분경 장례식장을 찾아 자매를 추모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도 이날 장례식장을 찾았다. 빈소에 들어선 정 장관은 장씨를 끌어안고 “이렇게 밖에 못해드려서 죄송하다”며 “이제 마음 푸시고 (딸들) 편히 보내주세요”라고 눈물을 흘렸다. 정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어머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고 싶어 공간이 마련됐다”며 “두 분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더 이상 성폭력과 2차 피해로 인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성가족부가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사건 진상조사 최종 결과를 묻는 질문에는 “경찰청이 문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이번 추모행사 재원에 대해서는 “익명의 기부자들이 보낸 돈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설명했다. 반면, 장씨는 “정부 지원으로 치른 것”이라며 “선례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아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장례식 실무와 안내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맡아 장씨를 도왔다.

‘단역배우 자매 사건’은 지난 3월 청와대 청원에 20만명을 돌파하면서 진상조사팀이 꾸려졌다. 경찰청은 1000쪽에 이르는 자료를 확보하고 관련자 20명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조사 결과 발표는 미뤄지고 있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단역배우 자살사건 진상조사 중간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팀은 3월 28일부터 5월 17일까지 총 7건(819쪽)의 자료를 확보하고 관련자 20명 중 15명에 대한 조사를 완료했다.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12명 중 3명이 조사를 거부했고 1명은 소재 파악도 되지 않았다. 경찰에 의한 2차 가해 의혹도 기대에 못미친다는 평가다. 큰딸 서영씨에게 “가해자 성기를 그려 오라”고 했던 이모 경찰관은 퇴직 후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조사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이날 오후 4시 서울 중구구민회관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치유-방관자에서 조력자로’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원장 변혜정)이 개최하며 젠더폭력과 인권에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홈페이지(stop.or.kr)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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