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선거과정에서의 혐오표현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7일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선거과정에서의 혐오표현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소수자, 여성, 노동조합, 세월호 유가족, 장애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지난 6·13지방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비하와 모욕 등 혐오표현이 대상이 된 이들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선거 기간은 ‘표현의 자유’ 속에 ‘혐오 발언’이 공적 영역에서 극대화된다. 일부 후보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면서 위기를 조장해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으로 쓴다.

지난 17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선거과정에서의 혐오표현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는 다양한 대상에 대한 혐오가 일상화되는 상황도 문제지만 특히 전국민의 눈과 귀를 향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선거 국면에서 제재의 필요성과 방법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선거철만 되면 언론은 물론, 현수막, 공보물, 유세현장, 심지어 휴대폰 문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혐오표현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는 무엇보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선관위는 더욱 소극적이다. 대구시선거관리위원회는 그나마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요청한 혐오·차별 표현 자제 요청을 받아들여 후보자들에게 공문을 보냈지만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같은 혐오표현은 혐오 당사자에게 충격적이고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해도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것이 조사를 수행한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 정민석 활동가의 설명이다.

선거 기간 혐오표현 사례들

지방선거에서 김문수 서울시장 후보는 도시를 여성에 빗대며 “매일 씻고 피트니스도 하고 해서 자기를 다듬고 옆집하고도 비교를 해야” “동성애는 흡연보다 해롭다” 는 등의 발언을 했다.

문제는 최근 선거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6년 총선 당시에는 기독자유당이 “동성애가 에이즈를 유발한다” “할랄단지를 조성하면 대한민국이 테러 위험국이 된다”고 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이 접수된 바 있고, 2017년 대선 당시 홍준표 후보는 “설거지를 (남자가) 어떻게...하늘이 정해놨는데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한테 시키면 안 된다”, “(성소수자라는 용어에 대해) 난 그거 싫어요”,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 “동성애는 하늘의 뜻에 반하니 법적으로 금지가 아니라 엄벌을 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해 분노를 샀다.

후보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홍미영 후보는 지방선거에서 성평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여성전략공천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비방의 타깃이 됐다. 반대 세력들은 온라인상에서 홍 후보가 여성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력을 들어서 ‘메갈 후보’라면서 매도하고, ‘페미질’ 하지 말라고 공격했다. 특히 당내 경선의 경쟁 후보 지지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으려한다고 공격했고, 평범한 당원들을 선동했다. 위키백과에는 악의적 편집도 발생해 다양한 이력이 삭제되고 여성운동상 수상경력만 남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는 벽보가 훼손됐고, 협박과 욕설이 담긴 메시지를 받았다.

반복되지만 제재 없어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의 혐오표현이 반복되자 이번 지방선거 기간에는 시민단체가 연대해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를 조직해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혐오표현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온라인을 통해 접수된 사례를 홍보물로 만들어 대국민활동을 전개했다. 또 총 8건이 신고돼 건수가 가장 많았던 김문수 후보를 대표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인권위는 지방선거를 전후해 혐오표현에 관해 대책을 요구하는 인권시민단체들과 몇차례 간담회를 가지고 진정 접수를 받았으나 이렇다 답변은 내놓지 못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혐오표현에 대한 규정하고 있지 않아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진정사건으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시민단체와 인권위는 무엇보다 선거 때마다 문제가 반복되는 만큼 선거관리위원회가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구시선거관리위원회는 그나마 대구경북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요청한 혐오·차별 표현 자제 요청을 받아들여 후보자들에게 공문을 보냈지만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현행 공직선거법에는 후보자에 대한 허위사실이나 부당한 비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항은 있지만 혐오로부터 보호될 수 있는 구체적인 조항은 없다. 또 후보자가 유권자를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제가 없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특히 선거기간에 표현의 자유와 정치인의 정치적 자유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면, 혐오세력들에게 ‘선거’와 ‘정치’야 말로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혐오를 유포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유려했다.

 

17일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선거과정에서의 혐오표현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열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7일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선거과정에서의 혐오표현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열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홍 교수에 따르면 선거법에 의해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해외사례로는 △일본 ‘TV나 라디오에서 타인의 존엄과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 △나이지리아 ‘정치적 운동이나 슬로건은 종교적·민족적·부족적·일부의 감정에 직간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모욕적인 말을 포함해서는 안된다’ △인도 ‘종교·인종·카스트·공동체·언어를 이유로 혐오나 적대 감정을 조장하는 방송을 해서는 안된다’ 등이 있다.

또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해외 입법 사례는 ‘증오선동’을 형사처벌하고 있고 정치인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사들에게 혐오표현 규제가 더 강력하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입법의 한계도 크다. 특히 형사적 규제는 능사가 아니라는 게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홍 교수는 특히 정치인은 더욱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고 정쟁화되면서 규제 효과가 크게 떨어지고 표현의 자유 전반을 위축시킬 우려도 크다고 했다.

인권위 인권정책과 이보람 사무관(변호사)은 “형사적 규제가 아니더라도 선거법령의 개정을 통한 규제와 선관위를 통한 규제가 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선관위가 선거관리 업무 외에 민주시민 교육과 국제교류·협력, 제도 연구 등 상시적으로 선거와 관련한 폭넓은 활동을 할 수 있으므로 법률개정을 통해 규제 권한을 새로 부여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권한 내에서 혐오 표현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무관은 인권위가 의견표명, 정책권고 등 권한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으며, 선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정당과 국회의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김문수 후보에 대한 진정을 국가인권위원회가 기독자유당의 경우처럼 각하결정 내리는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된다”면서 “지금과 같이 국가기관이 혐오 대응에 적극적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선거법이 개정된다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제21대 총선은 더 이상 혐오의 장이 아닌 소수자 인권이 보장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들은 공통적으로 혐오표현과 혐오표현의 문제점,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을 높이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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