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 성폭행’ 1심 무죄 판결

재판부 “위력 행사 증거 부족”

여성단체 “23년 전보다 후퇴”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전 지사의 무죄 판결을 규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전 지사의 무죄 판결을 규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혐의 사건 1심 무죄 선고에 여성단체들은 “성폭력 사건의 강력한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하고 여전히 업무상 위력에 대한 판단을 엄격하고 좁게 해석했다”며 재판부를 규탄했다.

여성인권단체와 여성학자 등으로 구성된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을 알리기까지 수백번 고민하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이번 판결은 침묵에 대한 강요가 될 것”이라며 검찰이 즉각 항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위력이 무엇인지,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는 어떻게 교묘하고 악랄하게 현실에서 이뤄지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사법부의 몫인데 사법부는 이번 사건은 현행 법을 적용하기 어렵다면서 입법부로 책임을 미뤘다”며 “언제까지 여성인권의 문제에 대해 법원은 그 책임과 몫을 미룰 것이냐”고 비판했다.

김씨의 변호를 맡은 정혜선 변호사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법리나 원칙에 의해 피해자 진술은 의심할 만한 요소가 없었고 피해자 진술에 부합하는 주요 증인들의 증언 또한 있었다”며 “무죄 선고는 변호인으로서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성폭력 사건의 특성의 이해 없이, 사건이 주는 사회적 의미와 무게감에 대한 고민 없이 무죄추정원칙이라는 말에 너무 쉽게 의존해 판결을 내렸다”고 했다.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성단체 활동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혐의 사건 1심 무죄 선고에 여성단체가 규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성단체 활동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혐의 사건 1심 무죄 선고에 여성단체가 규탄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안희정 측에서는 가족을 동원하고 지지자를 동원하고 어마어마한 변호인단을 동원하며 현재에도 위력을 동원하고 있다”며 “이번 재판 그 자체가 위력이었다”고 일갈했다. 그는 1994년 한국 최초 성희롱 판결이 있었던 서울대 교수 사건을 언급하며 “이번 판결은 서울대 교수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던 23년 전보다 훨씬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서울대 신모 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듬해 항소심 재판부는 신 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성적자기결정권과 교수와 조교 사이의 위력 행사 시 교수의 책임 등에 대해 명시했다.

권김씨는 “당시 2심 판결에 실망했지만 세상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반면, 오늘 판결에선 단 한 줄도, 한 단어에서도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아주 끔찍하고 비합리적이며 세상의 현실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의 더 불평등하고 더 문제적인 부분들을 훨씬 더 강화시킬 것이라고 생각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정하경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올해 2~4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를 살펴보면 2017년 같은 시기에 비해 상담 횟수가 40% 증가했지만, 상담 내용을 보면 ‘내 말을 믿어 줄까?’, ‘명예훼손이나 무고죄로 역고소 당할 수 있다던데’라며 성폭력 경험 말하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여전했다”면서 “피해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압력은 가해자를 비호하고 결국 성폭력의 예방과 근절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14일 오전 안 전 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위력’ 여부 였다. 재판부는 ‘위력’과 관련해 “피고인(안 전 지사)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며,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를 좌지우지할 위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피해자를 상대로 한 간음·추행 과정에서는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거나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제한 당했다고 볼 만한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했다. 5차례 강제추행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해자 의사에 반해 성적 자유가 침해됐다는 증명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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