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지 73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한국인 원폭피해자 7만명 중 2만여명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해방 후 고국에서조차 차별과 경원의 대상이 됐다.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원폭피해자 가운데 여성피해자는 59%에 달한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원폭 투하일인 8월 6일을 앞두고 원자폭탄 피해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투쟁에 앞장선 손귀달, 엄분연, 임복순 등 3명의 원폭피해여성을 호명해 한국여성운동사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한다.

 

[일본의 책임을 묻는데 앞장 선 원폭피해여성들]

한국인 원폭 피해자 7만명

2만여명 살아남았지만

해방 후 한국사회는

‘반 쪽발이’로 불러

종전 후 23년 만에 처음

한국인 피해자 존재 알리고

일본에 책임 요구한 ‘손귀달’

 

한국인 원폭피해자 손귀달. 히로시마 시립 제2고등여학교 3학년이던 그는 미쯔비시조선소에서 학도 동원되어 작업하던 중 피폭됐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1975, 창원사)
한국인 원폭피해자 손귀달. 히로시마 시립 제2고등여학교 3학년이던 그는 미쯔비시조선소에서 학도 동원되어 작업하던 중 피폭됐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1975, 창원사)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3일후 나가사키에 미국에 의해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한국원폭피해여성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원폭으로 인한 한국인 피해자는 히로시마에서 약 5만명, 나가사키에서 약 2만명으로 전체 약 7만명에 달했고, 이 중 섬광과 고열, 폭풍과 방사능으로 인해 원폭 투하 당시 즉사했거나 혹은 그해 말까지 사망해 ‘피폭사’한 한국인은 히로시마에서 약 3만명, 나가사키에서 약 1만명으로 전체 4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해의 참상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했다. 원폭 참상에 대해 원폭피해여성들은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지”, “원폭을 맞은 생명은 벌레 같았어”라고 말할 정도로 참혹했고, “아이고 나, 그 이야기 다 하려면 못해”라고 입을 다물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핍박 받아

원폭 피해를 입었으나 살아남은 한국 사람들 중 2만여명이 “야메(暗)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귀향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알지 못한다. 다행히 귀향했다 해도 이들은 귀환동포라는 말에 빗대어 “우환동포”라고 지칭되면서 사회적인 문제 집단으로 취급받았다. 이들은 강제 징용으로 또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으로 인해서 일본에 농토를 빼앗기고 수탈당했거나, 흉년으로 먹고 살길이 없어 일본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일본에서는 차별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삶을 지탱해왔는데도, 해방 후 한국사회는 이들을 ‘반 쪽발이’라면서 식민지배자인 일본인과 같이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부의 손상이 한센병 환자와 흡사해 경원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 대부분은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잿더미로 날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생계를 위해 또다시 몸부림쳐야했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은 미군정을 거쳐 해방 후 5년 만에 발발한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맹방의 위치에 올라섰다. 맹방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냉전시대에 가장 두려운 ‘빨갱이’로 몰리는 일이었고, 따라서 원자폭탄의 투하의 책임을 발설하지 못하였다. 또한 일본과는 국교 단절로 일본의 책임을 물을 길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 이에 더하여 원폭 피해에 대한 무지와 함께 자녀들의 앞길을 막을 수 있다는 우려로 피해자들은 오랜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침묵은 죽음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수많은 피해자들이 ‘원폭증’으로 죽어갔다.

2018년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원폭피해자들은 전체 약 2300여명으로 이중 여성은 1360명이다. 지난 70여 년간 많은 피해자들이 쓰러져 갔고 아픈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목숨을 부지하고 몸부림치는 동안 한국여성사에 원폭피해여성들은 빠져있었고 더 나아가 이들이 치료와 보상을 위해 투쟁해온 역사는 한국여성운동사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지 73년이 되는 8월 6일을 앞두고 원자폭탄 피해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투쟁에 앞장선 손귀달, 엄분연, 임복순 등 세 원폭피해여성을 호명해, 이들을 한국여성운동사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한다. 오랜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자신들의 피해와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용기는 한국여성사에서 기억해야함이 마땅하다.

15세에 피폭된 ‘손귀달’

한국의 원폭피해자로 공개적으로 나서서 처음으로 일본을 상대로 원폭 피해의 책임을 물으며 ‘원폭증’ 치료를 요구하는데 앞장 선 사람은 여성피해자인 손귀달이다. 손귀달(당시 15세)은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날 히로시마 시립 제2고등여학교 3학년 학생으로, 미쯔비시조선소에서 학도 동원되어 작업하던 중 피폭되어, 화상과 함께 얼굴에 5~6cm의 상처 자국이 남을 만큼 다쳤다. 아버지 손용조(당시 46세)는 말 기수였는데, 히로시마 체신국 4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건물이 무너지면서 중상을 입었고, 시청 앞에서 지하에 전신선을 매립하고 있는 인부들을 감독하고 있던 오빠 손진두(당시 18세)는 심한 화상과 함께 왼쪽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다.

손귀달은 그해 9월 가족과 함께 귀국했는데, 귀국 후 온 가족이 원폭의 후유증세로 앓았고, 3년 만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이러한 비극을 겪으면서 손귀달은 가난한 집안에서 입을 하나 덜어 주기 위해 아버지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면 지서에 근무하는 순경과 1950년 결혼했다. 결혼 2년 만에 태아를 사산을 했는데, 늘 심한 두통과 소화불량, 전신 신경통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 있어 이로 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2년 후인 1954년 봄에 첫 아들을 무사히 낳기는 했지만, 몸은 가눌 수조차 어렵게 되고 말았다. 종합 진찰 결과 원폭으로 인한 후유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이때부터 “형벌이 시작”됐다고 손귀달은 말했다. 남편은 손귀달이 과거를 숨기고 결혼했다고 비난했고 공공연히 집을 비웠으며, 생활비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 남편에게 애원도 하고 기다려도 봤으나 “날이 갈수록 칼날처럼 매섭게 죄인 취급”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손귀달은 옷가지 몇 벌을 챙겨 세 살 된 아들과 임신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와 부산으로 향했다. 손귀달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학교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으나,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아픈 몸을 이끌고 행상, 노점상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얼마 후 “원자탄을 맞았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말 한마디 못하고” 9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원폭피해로 인한 후유증이 귀책사유가 되어 이혼당하면서 남편으로부터는 아무런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손귀달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 결성에 참여하면서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피해 전문치료병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68년 9월 30일 밤 5톤(t)짜리 밀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건넜던 현해탄을 다시 건너 일본으로 갔다. 배를 탄지 사흘만인 10월 2일 새벽, 밀항이 발각되어 야마구찌 경찰서에 연행되자 손귀달은 “몸이 약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나른한 등의 증상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일본에서의 치료를 계획하고 밀항했다”고 밝히고 일본에서의 치료를 요구하며, 한국원폭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정부에게 원폭치료의 책임을 물었다. 종전 후 23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일본사회에 한국에 원폭피해자가 있음을 알리고 치료를 요구한 것이다.

 

손귀달의 오빠 손진두. 손진두는 동생 손귀달의 요구가 무산되고 2년이 지난 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승소해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1975, 창원사)
손귀달의 오빠 손진두. 손진두는 동생 손귀달의 요구가 무산되고 2년이 지난 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승소해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박수복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1975, 창원사)

일본, 한국인 원폭피해자 외면

일본의 주요 언론은 이 사건을 온정적인 태도로 보도했고, 손귀달을 구해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손귀달은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히로시마 원폭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1월 4일 야마구찌 지방법원은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손귀달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는데, 재판관은 “손피고는 원폭투하 당시 히로시마에서 피폭 당했음을 추정할 수 있으나 국법을 범한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해, 손귀달을 원폭피해자가 아니라 밀항자로 일차적으로 규정했다. 일본 법원은 손귀달이 원폭 투하 당시 왜 히로시마에 있게 되었으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묻지 않았다. 밀항이 엄중한 범법 행위라고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또는 수탈로 인해 살기 위해 일본에 올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된 사실은 외면했다. 일본이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외면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강점과 수탈의 역사를 덮어버렸다. 그럼에도 손귀달이 밀입국을 강행해 원폭 치료를 요구함으로써 한국에 원폭피해자들이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음을 일본 사회에 알렸고, 이는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고 한국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해 선도적이며 헌신적으로 나섰던 일본 언론인 히로오카 캐이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 막혀 일본 언론과 시민단체는 손귀달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없었고, 치료비 모금도 무산됐다고 한다. 손귀달이 “아들을 돌보기 위해 귀국을 원한다”는 이유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송환됐다고 당시 알려졌다. 그러나 후에 손귀달은 종합 진단 결과가 나오기로 돼 있는 예정일을 불과 11일 앞두고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을 보면 손귀달의 의사에 반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기에 강제 송환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 좌익 계열과 손귀달이 연관될까봐 염려했고, 좌익계열의 모금이라는 이유로 성금을 거절했다. 손귀달은 1968년 11월에 한국으로 송환되자 밀항단속법 위반으로 입건됐고, 한국 사회와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생계를 위얼마 후 일본 토교의 독지가가 손귀달의 원자병을 무료로 치료해 주겠다는 초청장을 보내왔으나 해 또다시 동분서주해야 했다. 밀항 전과 때문에 출국이 거부됐고, 결국 원자병을 치료해 보겠다는 마지막 희망이 깨어졌다. 그 후 1972년 3월에는 밀항 알선자로 연행된 적이 있었고, 일본 마약밀수업자들에게 한국인이 제조한 마약, 필로폰을 전달해준 죄로 구속되기도 했는데, 손귀달은 이 사건 담당검사 앞에서 “원폭”때문이라고 울부짖었다.

손귀달은 출소 후에 극빈자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관이 1996년에 설립되자 입소하여 반신불수의 몸으로 생활했다.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일본 너희들이 도대체 사람이냐? 60년 동안 우리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은 누가 우예 보상하냐 말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갈게 아니라 우리를 찾아서 용서를 빌어야제…. 한국 정부도 그러면 안돼. 우리가 남의 나라 사람이야? 우리 병신들 돈 훔치가 경부고속도로 지은 거 아이가. 이제는 한 푼도 빼뜨리지 말고 내놔야제” 라면서 일본 정부를 비난했고,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으나 원자폭탄 피해자에게 무심한 한국정부에 대해 분노했다. 원폭피해로 인한 아픈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 한평생 분투했던 손귀달은 2009년 11월19일 영면했다.

손귀달의 요구는 무산됐으나, 2년 뒤 오빠 손진두가 일본에 밀항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를 계기로 결성된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일본 시민회’ 등의 지원을 받아 1978년에 마침내 승소해,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오빠 손진두는 여동생의 선구적인 행동에 용기를 얻었음이 분명하며, 손귀달은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도일(渡日)치료에 초석을 놓은 셈이다. 원폭피해여성으로서 겪어야했던 아픔과 비극, 그리고 그 비극을 딛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던 손귀달의 용기가 한국여성의 역사에 기록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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